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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가는 날>부터 <기생충>까지, 해외 영화제를 통해 되짚어 보는 한국영화 100년

  • [등록일]2019-09-20
  • [조회] 230

<시집가는 날>부터 <기생충>까지,

해외 영화제를 통해 되짚어 보는 한국영화 100년




<기생충>의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 이후 한국영화에 대한 국내외 관심이 급증했다. 그만큼 세계적으로 명망 있는 영화제에서의 상영과 수상은 해당 작품과 감독, 더 나아가 출신 국가의 영화를 알리는 데 가장 효과적인 장치임에 틀림없다. 수상의 기쁨과 함께 <기생충>과 같은 명작이 탄생할 수 있었던 배경과 토대로서 우리 영화의 지난 역사를 되짚어 보는 것 역시 중요하다. 국내 영화 산업의 기반과 예술적 밑바탕이 탄탄하지 못했다면 해외 영화제에서의 성과 역시 불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해외 영화제에서의 역대 한국영화 수상 기록은 곧 변화무쌍했던 우리 영화사를 투영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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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인 이미지 출처: 이투데이(2019.5.27). 칸 황금종려상, 영화 '기생충' 봉준호 감독·배우 송강호 27일(오늘) 오후 귀국


1. <기생충>, 한국영화 100년의 축포를 터트리다


지난 5월 영화계는 물론 한국 사회 전체를 떠들썩하게 한 소식이 프랑스 칸으로부터 들려왔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2019)이 ‘제72회 칸국제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받은 것이다. 영화에 특별한 관심이 없는 이라도 익히 들어봤을, 그리고 연초마다 신년 운세를 보듯 매년 5월이면 모든 미디어에서 우리 영화의 수상 여부를 점치곤 하는 칸 영화제 아닌가. 한국영화가 칸에서 황금종려상을 차지했다는 소식은 많은 영화팬들이 너무도 기다려 온 순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특히, 올해는 한국영화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는 해로 그 기쁨은 배가 되었다. 국내외 뉴스와 방송은 일제히 봉준호 감독의 전작과 그간의 인터뷰를 갈무리하는 것은 물론, 꽤 많은 미디어가 ‘한국영화의 칸 도전기’라는 주제로 임권택 감독의 <춘향뎐>(2000)에서 <기생충>까지 칸 경쟁 부문에 출품되었던 한국영화를 나열하며 16전 17기의 성공을 자축했다.


2. <기생충> 그 후, 그리고 그 이전


물론 영화제는 순위를 나열하는 스포츠 경기가 아니다. 아무리 경쟁 부문이라 할지라도 수상의 결과에 따라 해당 영화를 좋은 혹은 덜 좋은 영화로 가늠할 수 없다. 다만, 영화제 상영과 수상은 많은 이들에게 뛰어난 작품으로 인정을 받았다는 점에서 영예롭고 의미있는 선물이 될 수 있다. 더불어, 칸 같은 세계적으로 명망 있는 영화제에서의 수상은 해당 작품과 감독을, 더 나아가 출신 국가의 영화를 알리는 데 가장 효과적인 장치임에는 틀림없다. 실제 <기생충>의 황금종려상 수상 이후 한국영화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음을 실감한다. 국내에서는 평소 영화에 큰 관심이 없던 사람들도 <기생충>을, ‘한국영화 100년’을 일상에서 쉽게 언급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으며 해외에서도 우리 영화에 대한 호기심이 커졌다. 칸 영화제 이후 이탈리아, 영국, 프랑스 등지에서 한국영화 특별전을 개최하는 것은 물론 필자가 몸담고있는 한국영상자료원의 ‘한국 고전 영화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 역시 수요가 늘어났다. 그 배경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봉준호 감독이 황금종려상 수상 관련 외신 인터뷰에서 가장 영향받은 감독으로 고(姑) 김기영 감독을 언급해 해외 접속자 수가 늘어난 것이 가장 크다. 더불어, 영국의《가디언》과 미국의《인디와이어》에서도 이례적으로 해당 유튜브 채널을 소개하며 트래픽 증가에 영향을 미쳤다. 지난 6월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개최된 ‘이탈리아 볼로냐 영화제(Il Cinema Ritrovato)’에선 <하녀>(김기영, 1960)를 비롯한 1960년대 한국 고전 영화 7편이 상영되었는데, 매회 매진 사례를 이루며 많은 관객이 바닥에 앉거나 서서 영화를 관람했다. 또, 프랑스 최대 영화제 중 하나인 ‘뤼미에르 영화제’는 올해 <기생충> 상영은 물론 봉준호 감독이 추천하는 한국 고전 영화 섹션을 별도로 운영할 예정이다. 그뿐이 아니다. <기생충>은 전 세계 202개국에 수출되어 역대 한국영화 중 최다 수출 기록을 세웠다. OTT 플랫폼 활성화로 인해 올해 칸 영화제 필름 마켓은 예년에 비해 다소 한산했지만, <기생충> 덕에 우리 영화에 대한 해외 배급사들의 반응은 매우 뜨거웠다.


이렇듯 해외영화제 수상은 작품성을 인정받는 부분 외에도 한국영화에 대한 관심을 촉진하고 인지도를 높이는 문화·외교적 효과와 해외 수출, 그리고 국내 영화계 활성화라는 산업적 측면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와 동시에 <기생충>이 탄생할 수 있었던 배경과 토대가 되는 우리 영화산업의 발전 과정 및 역사에 대한 이해 또한 필요하다. 왜냐하면, 국내 영화산업의 기반과 예술적 밑바탕이 탄탄하지 못했다면 <기생충>이 거둔 성과 역시 불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부터 살펴볼 해외영화제에서의 역대 한국영화 수상 기록은 곧 변화무쌍했던 우리 영화사를 되짚어 보는 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3. 세계영화사에 첫발을 내디딘 한국영화


1950년대 후반, 우리 영화산업이 중흥기에 접어들면서 국내에도 영화제와 시상식이 생겨났으며, 동시에 우리 영화를 해외영화제에 출품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는 영화인의 사회적 지위를 높이고, 영화계를 한국 사회의 일부로 안착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특히, 해외영화제 진출은 한국전쟁 이후 국가 재건 과정에서 문화 외교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1955년 ‘제2회 아시아영화제’에 옵서버로 참여한 국내 영화계는 1957년 ‘제4회 아시아영화제’부터 작품을 출품했으며, 여기서 <시집가는 날>(이병일, 1956)이 특별희극상을 받아 최초의 해외영화제 수상작으로 이름을 남겼다. 뒤이어 <로맨스 빠빠>(신상옥, 1960), <또순이>(박상호, 1963), <보통여자>(변장호, 1976) 등의 영화가 남우/여우주연상을,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신상옥, 1961)가 최우수 작품상을 거머쥐는 등 19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개최된 아시아영화제에서 한국영화는 두각을 나타냈다. 물론 아시아를 넘어 미국과 유럽 등지의 영화제에서도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1960년 ‘샌프란시스코 영화제’에서 배우 안성기가 <10대의 반항>(김기영, 1959)으로 아역상을 수상한 것이 시작이었다. 같은 해 ‘제9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 <구름은 흘러도>(유현목, 1959)가 출품된 데 이어 그 이듬해에 강대진 감독의 <마부>(1961)가 은곰상을 받았다. 3대 영화제 중 하나인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한국영화가 첫 수상을 한 것은 당시로써는 매우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외에도 ‘시체스국제영화제’에서 <천년호>(신상옥, 1969)가 황금 감독상, <화녀>(김기영, 1971)와 <충녀>(김기영, 1972)가 여우주연상을 받았고, ‘제12회 파나마국제영화제’에서는 <토지>(김수용, 1974)로 김지미가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이처럼 60년대 이후 우리 영화의 해외영화제 수상이 급증한 이유는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국내 영화산업의 활성화와 문예영화의 영향을 주요인으로 들 수 있다. 1960년대에 한국영화는 연간100~200편이 제작되었으며, 1969년에는 233편의 제작 편수와 1억 7,800만 명이라는 놀라운 연간 총관객 수(방화+외화 관객 합산)를 기록할 정도로 영화산업의 르네상스였다. 국민 1인당 연평균 관람 횟수가 5~6회에 이를 만큼 영화가 대표적인 대중문화콘텐츠로 자리 잡음으로써 산업은 안정화되었고, 이러한 비약적인 발전은 역량 있는 감독과 작품을 배양하는 토대가 되었다. 더불어 당시 창작 시나리오의 부족으로 인해 많은 감독이 차선책으로 이미 완성도를 인정받은 소설과 희곡을 영화화했다. 탄탄한 이야기 구조와 역량 있는 감독의 연출력으로 <오발탄>(유현목, 1961),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혈맥>(김수용, 1963) 등이 좋은 평가를 받자 영화계는 문예영화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우리 정부가 한국영화를 육성한다는 취지로 마련한 우수 국산 영화 보상제도가 이 장르의 부흥을 이끌었다. 당시에도 외화의 인기는 매우 높았는데, 정부는 제작업과 수입업을 일원화시켜 우수영화를 제작하는 영화사에 외화 수입 쿼터를 할당하는 특전을 부여했다. 그리고 보상제도 기준 중 하나가 문예영화였다. 영화계와 정부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생겨난 붐에 대해 창작 시나리오 양성을 위축시켰다는 부정적 평가도 있다. 하지만,흥행에 구애받지 않고 다양한 시도를 통해 자기만의 영화적 문법을 창작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함으로써 작가주의 감독의 출현을 가능케 했고, 이들이 연출한 영화가 해외영화제에 출품돼 작품성을 인정받을 수 있었던 순기능이 더 컸다고 볼 수 있다.



4. 세계에 ‘한국영화’라는 인장을 새기다


1980년대 유신 정권이 붕괴되고 신군부가 권력을 장악하면서 일정 부분 규제가 완화된 영화 정책을 내놓았다. 검열과 탄압으로 인해 계몽, 반공 영화 일색이던 영화계에 리얼리즘을 포함한 종교, 멜로, 역사물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이 등장했다. 또, 영화가 오락거리의 기능을 넘어 정치, 사회적 역할을 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대두돼 독립영화가 태동하기도 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이두용, 이장호, 임권택, 하명중, 배용균 감독 등을 중심으로 사회적 메시지와 확고한 주제의식을 아름다운 영상미로 표현한 작품들이 대거 등장해 국내 영화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이는 해외영화제, 특히 3대 영화제(칸, 베를린, 베니스)를 비롯한 유럽의 명망 있는 필름 페스티벌이 한국영화를 주목하는 계기가 된다. 이두용 감독은 <피막>(1980)으로 ‘제38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감독 부문 특별상인 ISDAP((Integrated Social Development Assistance Program)상을 수상했으며, 1984년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로 최초로 칸 영화제에 초청되었다. 그는 1970, 80년대 한국영화의 성장과 변화를 주도한 감독 중 하나이자 국제영화제에서 본격적으로 우리 영화를 조명하게 만든 영화인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하명중 감독의 <땡볕>(1984)이 ‘제35회 베를린국제영화제’ 본선에 진출했으며, 이장호 감독의 <바보선언>(1983)은 ‘제38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ZITTY상을 수상했다. 배용균 감독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1989)은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에 이어 ‘제42회 칸국제영화제’의 ‘주목할 만한 시선’에 초청되었으며, ‘제42회 로카르노영화제’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받기도 했다.


여러 거장 중 임권택 감독은 한국 고유의 정서를 미학으로 승화시킨 작품들을 선보이며 ‘임권택’이라는 감독 개인과 ‘한국영화’라는 국가의 인장을 세계 영화계에 새기는 역할을 했다. 그의 작품 중 <만다라>(1981)와 <길소뜸>(1985)은 차례로 베를린영화제 본선에 진출했다. 또, 배우 강수연은 임감독의 1987년 作 <씨받이>로 ‘제44회 베니스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거머쥔 데 이어, <아제 아제 바라아제>(1989)로 ‘제16회 모스크바국제영화제’ 최우수 여우주연상까지 받으며 월드 스타로 급부상했다. 임권택 감독을 향한 해외 영화제의 러브콜은 2000년대까지 이어졌다. <춘향뎐>(2000)으로 그는 아시아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제55회 베를린국제영화제’ 명예 황금곰상을 수상한 것과 동시에 ‘칸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한국 영화인으론 처음 초청됐다. 그리고 그로부터 2년 후 임감독은 <취화선>(2002)으로 ‘제55회 칸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을 거머쥐며 최초의 기록을 늘렸다.


이렇듯 1980년대 우리 영화는 토속적 소재와 한국적 정서로 지역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당대 한국사회의 문제를 비판적으로 제기해 해외영화제의 눈길을 사로잡으며 굵직한 수상작을 쏟아냈다. 이러한 경험은 여전히 검열과 제재로 자유롭지 못했던 영화인들에게 국산영화 역시 세계 진출이 가능하다는 인식 전환을 일으켰고 향후 한국영화 산업이 세계적 수준으로 도달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5. 세계 영화인의 마음을 훔친 거장 감독들의 출현


1990년대 후반 이후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영화는 비약적인 성장을 한다. 대기업과 금융자본이 영화계로 유입되면서 비로소 산업의 틀을 형성하게 되었으며, 문화콘텐츠의 경제효과를 인식하게 된 우리 정부가 여러 진흥 정책을 마련하면서 한국영화산업의 발전은 가속화되었다. 27억 원의 제작비를 들여 600만 관객을 불러모은 <쉬리>(강제규, 1998)의 성공 이후 ‘한국형 블록버스터’라 불리는 작품들이 속속 등장했다. 또한, 1998년 ‘CGV 강변’을 시작으로 대기업 중심의 멀티플렉스가 확산돼 전국의 스크린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으며, 이러한 극장 생태계의 변화는 많은 관객을 동시에 흡수할 수 있는 ‘와이드 릴리즈 개봉’을 가능케 했다. 2003년 마침내 <실미도>(강우석)가 천만 관객 시대를 열었으며, 최근 <기생충>까지 한국영화는 총 19편의 천만 관객 영화를 양산했다. 2012년 처음으로 우리 영화의 총관객 수가 1억을 넘어섰고 작년(2018년)까지 7년 연속 1억 관객을 유지하고 있다.


한국영화 산업의 양적 성장은 자연스럽게 질적 발전으로 이어졌다. 창작의 자유로움과 자본의 뒷받침은 새로운 세대를 탄생시켰는데, 이들의 공통점은 영화를 영화로 즐기며 자신만의 영화 문법을 체득했다는 것이다. 이전 세대가 직업인으로서 영화계에 입문해 현장에서 자신만의 문법을 완성해 나가거나 영화를 사회적 메시지의 도구로 활용했던 것과 달리, 이 세대는 다양한 장르의 연출에 적극적으로 도전했다. 각자의 독특한 개성을 완성도 있는 미학으로 구현함으로써 흥행과 평단의 지지를 얻었고 이는 해외영화제 수상으로 이어졌다. 홍상수 감독의 데뷔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은 베를린국제영화제에 초청되었으며, ‘제26회 로테르담국제영화제’에서 타이거상을 받으며 ‘한국영화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 이후로도 홍감독의 차기작은 연이어 유수 영화제에 초청되었고, ‘제67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는 <밤의 해변에서 혼자>(2016)에 출연한 김민희가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또한, 이창동 감독의 경우 <오아시스>(2002)로 ‘제59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했고 문소리는 신인배우상을 거머쥐었다. 이후 ‘칸국제영화제’에서 <밀양>(2007)의 전도연이 여우주연상을 받은 데 이어 <시>(2010)로 이창동 감독 본인이 각본상을, <버닝>(2018)은 기술 부문 최고상인 벌칸상과 국제비평가협회상을 연달아 수상했다. 박찬욱 감독은 ‘칸국제영화제’에서 <올드보이>(2003)가 심사위원 대상, <박쥐>(2009)는 심사위원상, <아가씨>(2016)까지 벌칸상을 수상하며 ‘칸이 사랑한 감독’이라는 애칭을 얻었다. 김기덕 감독은 같은 해(2004년)에 열린 ‘제54회 베를린국제영화제’와 ‘제61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각각 <사마리아>(2004)와 <빈 집>(2004)으로 감독상을 연속으로 받았으며, <피에타>(2012)로 ‘제69회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까지 가져갔다. 마지막으로 봉준호 감독은 <괴물>(2006)과 <도쿄!>(2008), <마더>(2009)로 ‘칸국제영화제’의 ‘주목할 만한 시선’에, <옥자>(2017)와 <기생충>으로 경쟁 부문에 초청되어 지금까지 5번이나 칸 레드카펫을 밟았고 마침내 황금종려상을 거머쥐었다.



위에 언급된 작품들을 포함해 2000년대 많은 한국영화가 해외영화제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한국의 사회문화적 특수성을 반영하면서도 탈지역적 특색을 지닌, 동시에 영화적으로도 완성도가 뛰어난 작품이 지속적으로 생산되어 세계적으로 그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그리고 그 성과는 한국영화의 미래 가능성을 확장하고, 국내 영화 산업을 활성화하는 동력으로 다시금 흡수됨으로써 우리 영화의 도약을 이끌고 있다.


참고자료

김미현 (2006). 「한국영화사」. 서울: 커뮤니케이션북스.


글ㅣ정민화 한국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팀 프로그래머

     (출처 : 한류NOW 2019년 9+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