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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 40여개 나라에서 활동하고 있는 KOFICE 통신원들이 전하는 최신 소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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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인디 뮤지션 미셸, 김치는 엄마 사랑과 동의어

  • [등록일] 2016-07-18
  • [조회]2820
 

미셸 조너(Michelle Zauner, 27세)는 한국인 어머니와 미국인 아버지를 둔 미국 여성으로 미국의 인디 밴드, <리틀 빅 리그(Little Big League)>의 보컬 싱어 겸 기타를 맡고 있다. 2011년 결성된 리틀 빅 리그(Little Big League)는 이미 2장의 앨범을 발표했고 인디 팬들 사이에서 서서히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그녀는 브루클린 지역에 거주하며 음악 활동과 함께 글 쓰는 일을 하고 있다. 

최근 패션 전문지《글래머(Glamour) 》에서는 올해로 11번째, 에세이 공모전을 실시했는데, <리틀 빅 리그의 리드 싱어> '미셸 조너'가 출품한 수필이 영예의 장원을 차지했다. 에세이 주제는 한국 음식에 대해 관심이 있는 이들이라면 눈길을 줄 만한 것이다. 《글래머》 지는 7월 13일자 온라인 판으로 그녀의 에세이를 소개했다. 브루클린에 위치한 그녀의 아파트 안, 부엌에서 찍은 사진 속 그녀는 유난히 한국인의 유전자가 강하게 발현돼 보인다. 아마도 그녀가 수필 속에서도 언급한 김치 때문일까. 일단 상을 받은 만큼 정갈하게 써내려간 에세이를 독자들에게 소개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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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국인 어머니를 둔 반 한국 여성이다. 학창 시절에는 도시락에 빨간 색의 오징어 요리를 싸가지고 다녔다. 당시 내 도시락을 보고 놀려대던 백인 친구들은 이제서야 한국 음식을 '차세대의 요리(Next Big Thing)'라며 칭송하고 있다. 내가 자라난 곳은 미국의 북서쪽에 위치한 작은 대학촌으로 인구의 90퍼센트가 백인이었다. 사춘기 시절, 나는 내 안에 흐르고 있는 한국인 유전자를 좋아하지 않았다. '본래 어느 나라에서 온 거야?'라는 질문 좀 그만 받았으면 싶었다. 어릴 때엔 어머니와 집에서 한국어를 했기에 내 영어는 아직 서툴렀다. 그렇다고 한국어로 이야기 할 만한 한국 친구들도 주변에 없었다. 사실 어린 시절에는 나 스스로를 한국인이라고 느낄 만한 아무 것도 없었다. 하지만 음식에 있어서만은 예외였다. 


어머니는 집에서 아버지를 위해서는 미국식 저녁을, 그리고 나와 어머니 자신을 위해서는 한국 음식을 준비해주셨다. 나의 아버지는 필라델피아 출신으로 서울에서 몇 년간을 거주하며 군대에 자동차를 파는 일을 하시다가 당시 호텔에서 일하던 어머니를 만나셨다. 아버지는 한국에서 보신탕을 맛볼 정도로 새로운 음식을 맛보는 것을 좋아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빠에게 가장 편안한 음식은 스테이크와 감자였다. 매일 저녁, 어머니는 두 가지 식사를 준비했다. 아버지를 위해 연어를 굽고 브로콜리를 데치는 한편 찌게를 끓이고 작은 접시에 여러 가지 반찬을 준비했다. 매일 저녁, 우리 집에 있던 자동 밥솥에서 '맛있는 흰 쌀밥이 곧 완성될 예정입니다.'라는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올 때면 우리 3식구는 둘러앉아 동서양이 완벽하게 조화된 저녁 식사 시간을 갖고는 했다. 


내 입 속에서는 진정한 퓨전 음식이 창조됐다. 젓가락으로 티본 스테이크와 생선전을 한 입씩 먹으며 말이다. 나는 미국식 감자구이에 고추장을 찍어먹거나 마른 오징어에 마요네즈를 찍어먹는 걸 무척 좋아했다. 한국 음식에는 물론 좋아할 만한 요소가 많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점은 극단적인 면이다. 뜨겁게 제공되어야하는 한국 음식은 델 정도로 뜨겁고, 신선해야 한다는 뜻은 아직 살아서 움직이는 정도를 의미한다. 뚝배기에 담아 제공되는 찌게는 그 열을 오래도록 유지한다. 계란을 깨트리면 눈 앞에서 계란이 익는 것이 보일 정도다. 물냉면처럼 차갑게 먹어야하는 음식은 얼음을 넣어 만들어야 하니 말 다 했다. 10대 후반이 되자 알탕과 칼국수 등 한국 음식에 대한 나의 열망은 극에 달했다. 한 번은 가족들이 모두 긴 휴가를 떠났는데 주변에 한국 식당이 하나도 없는 곳이었다. 어머니와 나는 호텔 뷔페 음식도 시큰둥해져 호텔 방에서 햇반과 김으로 식사를 하곤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어머니가 2년간 암과 싸우다 돌아가셨을 때, 내게 정서적 안정을 가져다준 것은 한국 음식이었다. 어머니는 2014년에 암 진단을 받으셨다. 배가 아파 의사를 찾았더니 희귀 암 4기에 접어들었으며 이미 온 몸으로 전이됐다는 선고를 받은 것이다.  


나는 오레건으로 돌아와 어머니가 항암치료 받는 것을 도와드렸다. 암 발견 후 4개월간, 나는 그녀가 천천히 사라져가는 것을 목격했다. 항암치료는 어머니의 머리카락과 식욕, 그리고 영혼을 앗아갔다. 어머니는 음식이 혀에 닿으면 타는 듯한 아픔을 느낀다고 했다. 한때 그토록 아름답고 독특하던 우리 가족의 식탁은 단백질 가루와 맛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죽의 전쟁터가 되어 있었다. 저녁 식사 시간이면 칼로리 계산으로 머리가 아팠다. 한국 음식의 강렬한 향과 맛은 어머니의 위가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과했다. 어머니는 김치도 먹을 수 없었다. 나 역시 어머니와 함께 체중이 줄어갔다. 어머니를 간병하느라 에너지가 소진된 것은 물론, 식욕을 하나도 느낄 수 없었다. 어머니를 돌보는 동안 내 체중은 15파운드가 줄었다. 키모 테라피를 두 차례 받은 후, 어머니는 더 이상 항암치료를 받지 않기로 결정하셨고 2달 후 돌아가셨다.  


어머니를 잃은 상실감을 채우고자 할 때마다 나의 기억들을 음식으로 향한다. 대학 시절, 집에 돌아갈 때면 어머니는 갈비쌈을 만들어주시곤 했다. 갈비쌈은 갈비를 상추에 싼 것이다. 어머니는 내가 비행기에 오르기 이틀 전부터 고기를 양념에 재두시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깍두기를 일주일 전에 담갔다. 그래야 내가 도착할 때쯤 완벽하게 익은 것을 먹일 수 있어서였다. 어머니와 함께 서울을 방문했던 어린 시절의 여름날도 기억난다. 시차가 맞지 않아 잠 못 이르던 밤, 어머니와 나는 할머니 집의 부엌에서 할머니가 직접 만든 반찬으로 밤참을 먹었다. 다른 친척들이 모두 잠들어 있던 때라 어머니는 내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곤 했다. '이게 바로 진정한 한국의 맛이야.' 하지만 어머니는 내게 한국 음식 요리법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엄마, 밥 짓는데 물을 어느 정도 넣어야 해요?'라고 물으면 '물이 손등에 올 때까지 부어.' 내가 갈비 요리법을 물으면 재료들을 무작위로 주면서 모든 양념은 '적당량'이라고 말했다. '그냥 엄마가 만든 것 같은 맛이 날 때까지 이거 저거 적당량 넣어봐.'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나는 그녀의 병에 대한 트라우마에 사로잡혔다. 멋지고 강인하면서 자신을 표현하던 어머니를 기억할 수 없었다. 꿈 속의 그녀는 늘 아파보였다. 그러다가 나는 요리를 시작했다. 처음 한국 요리의 조리법을 찾아봤을 때, 그다지 소스가 많지 않았다. 바비 플레이(Bobby Flay)의 한국식 타코나 김치찌게라는 기형적 음식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렇다가 어느날 오리엔탈 치킨 샐러드를 만드는 비디오에서 한국 유뷰트 방송 진행자인 망치(Maangchi)를 만나게 됐다. 


그녀는 마치 나의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배의 껍질을 중간에 한 번도 끊기지 않게 벗겨낼 줄 알았고 칼등에 묻은 양념을 손으로 밀어넣는 모습 역시 어머니와 똑같았다. 그녀는 영웅이 무기를 휘두르듯 부엌의 가위를 자유자재로 사용했다. 나는 잣죽의 레시피를 여기저기서 찾고 있었다. 잣과 쌀로 만든 이 음식은 아프거나 나이 드신 분들을 위한 요리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상실감에 젖어있다가 그 상실감이 배고픔으로 전환됐을 때, 내가 처음으로 먹고 싶었던 음식이 바로 잣죽이다. 나는 망치의 요리법을 주의 깊게 따라한다. 쌀을 물에 담그고 잣의 꼭지를 딴다. 요리를 하는 동안 어머니에 대한 추억이 떠오른다. 도마 앞에 서 있던 그녀의 모습, 조금은 우습게 들리던 그녀의 영어 억양. 

미국의 전설적 셰프, 줄리아 차일드는 TV 디너 시대에 속하는 많은 이들들에게 제대로 된 요리를 선보인 영웅이다. 그녀는 가정식의 소중함을 보여주었다. 망치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의 내게 줄리아 차일드 같은 존재이다.  나의 부엌에는 배추김치, 오이소박이, 깍두기 등 여러 재료로 만든 김치들이 각기 다른 발효 정도로 가득 차 있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김치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 사랑에 빠지지 마. 김치 냄새는 독해서 너의 땀구멍을 통해서도 냄새가 날 거야.' 

망치의 레시피를 따라 요리를 한 지도 벌써 1년이 됐다. 가끔씩은 비디오를 멈추고 다시 볼 정도로 나는 정확한 레시피를 습득하려 노력한다. 그렇지 않을 때엔 내 손과 맛세포가 기억 속의 맛을 따라하게 한다. 내가 만든 요리는 어머니의 것과 같은 적은 한 번도 없다. 하지만 괜찮다. 어쨌든 그것은 맛있으니까. 한식을 더욱 많이 배울수록, 나는 어머니와 더 가까워진 느낌이 든다. 

오래지 않은 어느 날 밤, 나는 꿈을 꾸었다. 어머니가 배추 김치를 담가 독에 담는 모습이었다. 꿈 속의 그녀는 아름답고 건강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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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글이다. 그녀가 세계 공영어 영어로 쓴 글에는 한국의 정서가 담겨 있다. 음식 속에 담긴 추억과 사랑, 정… 어쩜 한국 음식에 빠져든 전 세계의 한식 애호가들 역시 결국엔 한국 음식의 이런 감정적 부분에 매료된 것은 아닐까. 

단지 맛있다는, 단지 건강에 좋다는 것 뿐만 아니라 감정적 빈 공간까지 채워주는 한식, 앞으로 더 많은 이들에게 다가가길 바래본다. 

<* 기사 링크 http://www.glamour.com/story/real-life-love-loss-and-kimchi>


<《글래머(Glamour) 》지에 실린 미셸 조너의 기사 스크린샷>


<《글래머(Glamour) 》지에 실린 미셸 조너>


<《글래머(Glamour) 》지에 실린 사진. 어머니 정미와 함께 서울을 찾은 미셸 조너. 미셸 조너 제공>

※ 사진 출처:《글래머(Glamour) 》www.glamour.com


통신원이미지

  • 성명 : 박지윤[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 미국(LA)/LA 통신원]
  • 약력 : 현) 마음챙김 명상 지도자. 요가 지도자 전) 라디오코리아 ‘저녁으로의 초대’ 진행자 미주 한국일보 및 중앙일보 객원기자 역임 연세대학교 문헌정보학과 졸업 UCLA MARC(Mindful Awareness Research Center) 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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