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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뻘짓 안하고 음악 열심히 하겠습니다. 괜히 후크 안 만들고, 굳이 영어 가사 안 넣고, 그냥 저대로 열심히 좋은 음악 하겠습니다' 지난해 연말 콘서트에서 가수 싸이가 팬들에게 전한 고백이다. 이 말이 꽤 진정성 있게 들렸던 것은 '강남스타일'이라는 메가 히트곡으로 세계의 정상까지 올라가 봤던 싸이가 그 후 2년의 시간 동안 수 많은 고뇌와 치열했던 창작의 고통 끝에 얻어진 깨달음이었기 때문이다.
한류 드라마가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인식됐던 때가 있었다. 1세대 한류스타 배용준을 탄생시킨 '겨울연가'를 그 시초로 본다. 당시 '겨울연가'를 통해 배용준이 창출한 문화적, 경제적 가치는 엄청났다. 지금까지 '욘사마'로 대변되는 배용준의 한류 파워가 이어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 최고의 한류스타 장근석과 아이유가 출연한 드라마 '예쁜 남자'
어마어마한 한류의 위력을 본 이후 드라마 제작 시스템은 점점 변해갔다. 기획한 극본이 써지고, 캐릭터에 맞는 캐스팅을 진행하고 촬영에 들어가는 정상적인 기존 시스템은 파괴되기 시작했다. 한류형 드라마는 한류 시장에 부합하는 캐스팅을 먼저 진행한 뒤, 이를 통해 먼저 선투자를 받고 풍족한 자금력으로 드라마가 시작된다. 이 다음 단계에서 가장 큰 문제가 대두되는데 스타의 이미지가 작품의 내용이나 감동을 압도해 버린다. 이는 자연스럽게 드라마 콘텐츠의 질적 저하를 초래한다.
한 마디로 문화의 가치가 경제적 논리에 지배 당하는 형국이다. 본말전도(本末顚倒)가 시작되었으니 결과는 뻔해진다. 전초는 국내시장에서 흥행에 참패다. 국내 시청자들은 한류스타에 대한 동경이 비교적 적고, 깐깐한 안목을 가졌기 때문인데 가장 큰 예로는 지난 2012년 3월부터 5월까지 방영된 '사랑비'와 2013년 11월부터 2014년 1월까지 전파를 탄 '예쁜 남자'가 대표적이다. 남자주인공은 한류 배우 장근석과 각각 걸그룹 소녀시대 윤아, 가수 겸 배우 아이유가 호흡을 맞췄는데 기대했던 만큼 호평을 끌어내진 못했다. 이 밖에도 가수 비와 걸그룹 f(x) 크리스탈 주연작 '내겐 너무 사랑스러운 그녀', 배우 최지우가 출연했던 '수상한 가정부' 등이 이 같은 경우에 속한다.
이미 정해져 있는 한류 스타를 염두에 두고 작품을 써 나가다 보니 한계점이 많아지는 것은 당연했다. 연기자에 캐릭터가 들어가니 새로운 도전이나 변신이 가능할 리 없다. 심한 경우에는 한류스타의 멋있고 아름다운 모습만 담아내 드라마인지, 팬서비스용 비디오인지 분간이 안 되는 수준의 드라마로 전락하는 때도 왕왕 있었다. 게다가 소재 면에서도 한류를 의식하다 보니 스토리 라인이 단순하고 한국형 정통 멜로나 로맨틱 코미디 등 획일적인 장르의 드라마만이 양산되고 있다. 이렇게 라면 한류 드라마의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 문화의 안주는 곧 퇴보를 의미한다.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것은 싸이가 자신의 음악색과 아이디어를 순수하게 녹여내 발매한 '강남스타일'이 세계를 강타한 메가히트곡이 됐다는 사실이다. 세계적 신드롬을 일으킨 '강남스타일' 이후 말춤을 대변하는 골반춤을 내세운 '젠틀맨'이 나왔으나 전작에 미치지 못했다. 재차 미국 유명 가수 수눕 독(Snoop Dogg)의 손을 잡고 후크 중독성이 높고 클럽 음악을 표방하는 '행오버'(Hang Over)를 선보였지만 국내는 물론이고 세계시장에서 사실상 흥행에 실패했다.
'강남스타일' 당시의 싸이가 자신만의 음악색을 가지고 국내에서 10년 이상 한 길을 걸어왔던 가수였다는 것과 '겨울연가'의 배용준이 탄탄한 연기력과 부드러운 이미지를 선보여 왔던 9년차 배우였던 것을 떠올리면 향후 한류 드라마의 방향성은 비교적 명확해 진다. 이미 한류 팬들에게 높은 인지도를 자랑하는 기존 한류스타만을 캐스팅하는 것은 홍보, 투자 등에 유리한 고지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 오히려 지양되어야 한다. 국내에서 오랜 시간 지구력 있게 연기를 해왔고, 그 색깔이 한류 정서에 맞는 배우를 찾아 발굴하는 것이 한류의 발전을 도모하는 길이다.
특히, K팝 열풍에 편승해 한류 아이돌 그룹의 멤버들을 단숨에 주연 자리에 올려 놓는 경우를 보게 되는데, 이는 지극히 근시안적인 편협한 시각이다. 그 아이돌 팬덤에 의해 흥행 면에서 좋은 성적을 낼 지는 몰라도, 단발성에 그칠 뿐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결국은 스타의 이미지가 아닌 작품이 담고 있는 이야기에 초점이 맞춰져야만 한류 드라마의 미래를 볼 수 있는 건데, 이는 소재, 장르 면에서 고민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한국형 멜로나 로맨틱 코미디를 벗어나 또 다른 장르를 개척해 한류시장을 공략하는 '장르 확장'이 꼭 필요한 시점이다. 언제까지 꽃미남 외모의 완벽한 재벌에게 순애보적 사랑을 받는 캔디형 여자 주인공의 이야기를 보고 들어야만 할까. 국내 드라마 시장을 물론이고 세계적으로 드라마가 다양한 소재와 장르에 도전하고 있다. 한류 드라마 역시 진화해야 한다.
이런 시각에서 동명의 국내 만화를 드라마화 하고, 새 얼굴의 배우가 대거 등장해 지난해 말 국내에서 크게 흥행한 케이블채널 tvN '미생'이 향후 한류 드라마에 좋은 지향점을 제시할 수 있다고 여겨진다. '미생'은 유명한 한류배우, 흔한 재벌-캔디 구조의 러브라인 하나 없지만 국내에서 신드롬적인 인기를 끌었고, 나아가 한류 드라마 시장에서 성공여부도 높게 점쳐지고 있는 상황이다. 배우들이 각 캐릭터에 완벽하게 녹아 들었고,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회사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삶을 탁월하게 그려내는 데 성공했다고 평가됐다.
한류는 우리가 울고 웃고 공감하는 정서와 문화를 다른 문화권에 소개하고 설득시켜야 비로소 빛을 발한다. 다른 문화권 한류 팬들의 취향과 구미에 맞춰져 제작된 드라마가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이유다. 우리 연예계가 보유한 매력적이고 새로운 배우, 한국형 멜로가 아닌 새로운 장르, 발전된 드라마 기술 등을 탄탄하게 잘 그려진 작품 안에 그려내 한류 드라마 팬들에게 소개하면 어떨까. 이런 경우에야 다이아몬드 알을 낳는 제 2의 '겨울연가'를 기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