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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새롭게 데뷔해 활동하고 인지도를 쌓아가고 있는 걸그룹들을 보면 ‘콘셉트’ 의 한 시대가 바뀌어 가고 있는 게 느껴진다. 사실 ‘에이핑크’ 의 엄청난 인기 속에 어느 정도 예상 했었던 부분이긴 하나, 실제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걸 보면 약간은 신기하기도 하다. 바로 ‘요정돌’ 콘셉트가 대세로 떠오르고 있는 게 요즘의 추세다.
▲ 요정돌의 원조 에이핑크
이 콘셉트의 ‘교과서’ 는 단연 에이핑크다. 섹시 콘셉트가 난무할 때 홀로 순수한 요정 콘셉트를 밀어붙였고, 주변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독자적인 노선을 구축하며 정상에 올랐다. 엄청난 규모의 팬덤을 형성한 건 물론이고 지금은 일본 시장까지 진출하며 케이팝을 해외에 알리는 1등 공신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하지만 에이핑크가 정상에 설 때만 해도 에이핑크 뿐이었다. 겹치는 콘셉트의 걸그룹이 거의 없었고, 인기를 얻는 다 싶은 걸그룹 중에는 섹시한 느낌의 걸그룹들이 더 많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려졌다. 에이핑크가 제시한 노선을 따르는 후발 주자들이 많아지며 ‘순수한 요정 콘셉트’ 는 이제 새로운 대세가 되고 있는 모습이다.
▲ 청순한 매력의 앨범자켓을 선보인 걸그룹 '레드벨벳'
3월 마지막 주에 지상파 음악 프로그램에서 1위를 차지한 ‘레드벨벳’을 보라. 그녀들은 여타의 걸그룹이 내세우는 섹시한 느낌과는 살짝 거리가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완벽하게 청순한 스타일을 몰아붙이는 것도 아니지만, 적어도 성적인 매력으로 어필하는 걸그룹들과는 방향성 자체가 다르다. 어디 이뿐이랴. 최근 데뷔해서 좋은 반응을 얻고 각종 활동을 벌이고 있는 걸그룹 ‘여자친구’ 와 ‘러블리즈’, 그리고 ‘베리굿’ 같은 신진세력들도 모두 청순함과 순수한 콘셉트를 무기로 대중들을 만나고 있다. 저마다 음악적 스타일은 조금씩 다르지만, 과감한 노출로 승부하지 않는다는 점은 같다.
사실 이런 경향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상 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소위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일은 남녀를 불문하고 눈길을 사로잡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다. 어쩌면 영화계에서 신인급 배우들이 과감한 노출로 연기 커리어를 시작하는 일이 많아지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가 작용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다 보니 기획자들은 계속해서 자극원을 찾게 되었고, 노출 경쟁에 불이 붙으며 선정성 논란을 낳기도 했다.
하지만 일부의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었던 청순한 콘셉트의 걸그룹들이 치고 나오는 현상은 분명히 눈에 띌 정도로 두드러진다. 이제는 과거처럼 에이핑크만 돋보이는 것도 아니다. 이 콘셉트 안에서도 스타일이 분화되며 새로운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오는 상황까지 진행되어 온 것이다. 도대체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섹시만을 외쳐대던 케이팝 걸그룹 시장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가장 중요한 이유는 피로감 누적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반복되는 자극에 상당한 피로감을 느낀다. 게다가 자극적인 콘텐츠를 접한 대중들은 지속적으로 더욱 자극적인 스타일을 원하게 된다. 더 자극적인 스타일이 나오지 않으면, 실망감과 함께 다른 쪽으로 눈을 돌리게 된다. 섹시 콘셉트의 한계도 이런 원론적인 문제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우리가 용인할 수 있는 섹시 콘셉트에는 결국 넘어가지 말아야 할 선이 있고, 이 선까지 이르러 버린 수많은 콘텐츠들에게 더 이상 기대할 것들이 없어지자 다른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게 된 것이다. 분명 많은 대중들은 하나 같이 섹시하기만 한 걸그룹들의 콘셉트, 눈살을 찌푸리게 할 정도로 성적인 어필에 치중해 있는 콘텐츠에 엄청난 피로감을 느껴왔다.
여기에 정체성을 강조하게 된 최근의 트렌드도 한 몫을 담당했다. ‘대란’ 이라는 말을 쓸 정도로 많은 음원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요즘이다. 그만큼 엄청난 양의 음원들이 대중들의 선택을 기다린다. 특히 ‘걸그룹’ 시장은 끊임없이 새로운 그룹들이 데뷔하고 있고, 그만큼 수익을 내기 어려워진 게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대책으로 앞서 언급한 자극적인 스타일을 이용해 시선을 잡아끄는 방법을 사용하는 그룹들이 많아졌다. 하지만 이것도 소위 잘 나가는 걸그룹 말고는 효과를 못 보자 ‘정체성’을 찾는 작업이 중요하다는 생각들이 퍼지기 시작했다. 정체성은 단순히 그룹의 색깔을 말하는 게 아니다. 콘셉트부터 시작해 음악, 안무까지 통틀어 전 요소에 걸쳐 느껴지는 그 그룹만의 스타일을 뜻한다. 정체성이 중요한 이유는 무척 분명하다. 특별한 스타일에 반해 이들을 지지하게 되는 팬덤이 생기고, 활동을 이어나가며 새로운 것들을 시도할 수 있는 원동력이 만들어주는 게 바로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 청순 컨셉으로 데뷔한 신예 걸그룹 러블리즈(좌)와 여자친구(우)
짧게 치고 빠지는 그룹들은 결론적으로 정체성 형성에 실패한 것이다. 반짝 스타로 남거나, 혹은 이마저도 달성하지 못하고 조용히 사라지는 그룹들 역시 정체성 없이 활동에 나섰기 때문에 안타까운 결과를 맞이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치열한 경쟁 구조 속에서 끊임없이 강조되고 있는 건 ‘롱런의 가능성’ 이다. 롱런의 가능성을 높여주는 건 단연 정체성이다.
새로운 대세를 맞이하고 있는 걸그룹 시장이 명심해야 할 건 이런 대세 또한 영원하지 않을 거라는 것이다. 트렌드는 끊임없이 변한다. 대중의 취향도 당연히 파도가 치듯 세차게 변한다. 이 대세를 통해 알아야 할 점은 대세를 따라가는 게 아니라 대중들의 취향을 끊임없이 반영하고, 잘되는 것들 보다 ‘잘 할 수 있는 것’ 을 찾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대세라는 단어로 아티스트의 의견이나 기획의 아이디어를 묵살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가장 잘 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고민하고, 이 과정에서 나오는 콘셉트에 대한 생각들을 발전적으로 반영하는 과정을 통해 긍정적 결과를 찾아야 한다. 이 대세 또한 언젠가는 다른 이야기로 대체될 것이니.
바뀌는 시대에 발맞춰 가는 힘은 꾸준한 연구에서 나온다. 대중문화 또한 그렇다. 준비하는 자에게 열매는 달다. 섣부른 결론은 문제를 일으키기 쉽다. 우리가 지금의 대세 콘셉트 변화를 보며 느껴야 할 건, 모든 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이다. 케이팝계 전반에 걸쳐 우리가 나아가고 있는 방향이 맞는지 한 번 쯤 뒤돌아봐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