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업 현장의 가장 뜨거운 소식을 전문가들이 진단합니다.
우리나라 문화계의 가장 최신 소식부터 흐름 진단까지 재밌고 알찬 정보를 각 분야별 전문가들이 전합니다.
한국영화, 예술성과 대중성을 거머쥐다
언제부터인가 ‘한류’의 구체적 기원은 지난 1997년 《MBC》 〈사랑이 뭐길래〉가 중국 《CCTV》에 방영되며 불기 시작한 인기 바람이라는 것이 통설로 굳혀졌다. 한국 아이돌 그룹의 원조 격인 H.O.T.가 역시 중국에서 대히트를 치며 케이팝이 그 뒤를 이었고, 한국영화의 어떤 터닝포인트였던 <쉬리>가 1999년 일본에서 125만 관객을 동원하며 대중문화의 삼각축 중 영화가 가장 뒤늦게 한류에 올라탔다는 것이 정설로 통용되고 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그것은 지나치게 습관적인 주장이 아닐까?
이 글은 전통적으로 예술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거머쥐었던 일련의 한국영화들을 통해, 기존의 한류 논의를 다른 각도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가능성을 타진해보려는 문제제기적 시도다. 돈벌이에 방점을 찍는 산업적 측면을 넘어 문화, 예술적 시선으로 조망하면, <쉬리> 이전에 이미 영화 한류의 단초들이 제시됐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
*메인 이미지 출처: 셔터스톡/ Fer Gregpry
1. 들어가며
강준만 전북대학교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는 일찍이 『세계문화사전: 지식의 세계화를 위하여』(2005) 「제3장 신문·방송·영화」 편 ‘한류’ 란에서, “한국 대중문화가 1997년부터 중국에 진출해 성공하기 시작하자, 중국 언론은 99년경 ‘한류(韓流)’라는 말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다”며 그 구체적 사례들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① 97년 중국 《CCTV(중앙TV)》: 《MBC》 〈사랑이 뭐길래〉 방영, ② 98년 중국 《CCTV》 : 《KBS》 〈목욕탕집 남자들〉 방영, ③ 98년 5월 5인조 그룹 H.O.T. 앨범 중국에서 히트, ④ 98년 5월 베트남 《호찌민TV》: 《MBC》 〈의가형제〉 방영, 7월에 재방영(장동건 신드롬), ⑤ 99년 중국 TV 방송: 《MBC》 〈별은 내가슴에〉 방영, ⑥ 99년 3월 2인조 그룹 클론 한국과 타이완에서 앨범 동시 발매, ⑦ 99년 4월 영화 〈쉬리〉 일본에서 125만 명 관람, ⑧ 2000년 2월 H.O.T. 중국 베이징 공연 대성공, ⑨ 2001년 2월 타이완 TV 방송: 《KBS 2TV》 〈가을동화〉 방영 대성공, ⑩ 2001년 8월 탤런트 겸 가수 안재욱 타이완 공연 성공, ⑪ 2002년 1월 가수 보아 일본 가요계 데뷔 성공, ⑫ 2002년 중국 TV 방송: 《KBS》 〈겨울연가〉 방영, ⑬ 2003년 일본 《NHK》: 《KBS》 〈겨울연가〉 방영, 2004년 4월 〈겨울연가〉 재방영, 소설 『겨울연가』 일본에서 100만 부 판매 돌파 등이다.”
장규수 (2013)도 “한류의 발생 시점과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지역에서 다른 수용자를 대상으로 발생했기 때문에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다”면서도, “중국을 중심으로 한국 대중문화의 진출 시점을 볼 때, 한국 TV 드라마의 인기가 시작되면서 한국 대중음악의 인기로 확산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92년 한·중 수교 후 1993년 TV 드라마 〈질투〉가 처음으로 수출되었고, 1997년부터 〈사랑이 뭐길래〉 등이 인기를 얻으며 1998년 클론, H.O.T. 등의 음반이 발매되기 시작했다”고 비슷한 진단을 내렸다. 세부 사항에서의 크고 작은 차이에도, 분야별 한류의 해외 진출 순서에서 드라마와 대중음악이 선두주자였다는 사실에서는 동일한 의견이다. “한류 20년을 맞이해, 한류라는 역사적 지도에 아로새긴 빛나는 별들에게 바치는 일종의 헌사”를 표방하며, 방송을 필두로 게임, 출판만화, 웹툰, 애니메이션·캐릭터, 음악, 공연, 영화까지 총 8개 분야의 장르별 대표 콘텐츠를 선정, 소개한 『한류 20년, 대한민국 빅 콘텐츠』(2016)도 마찬가지다.
2. 예술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확보한 영화 한류
대구에 소재한 영화공간 ‘필름통’ 대표이자 영화평론가인 김중기 (2021)가 “영화는 한류에 가장 늦게 올라탄 장르”라고 단언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최근 몇 년간 한국영화는 소위 ‘바람’을 탔다. 이창동, 봉준호, 박찬욱, 김지운 등의 이름과 함께, 한국영화의 높은 완성도와 차별화된 스토리텔링이 세계로 전파되고 있다. 한국영화를 즐기는 외국 관객들이 늘면서 자막에 대한 장벽도 허물어지고 있다. 한류가 형성된 지 20년 만이다”라면서 말이다. “음악, 드라마에 비해 접근이 어렵기에 한 두 편의 흥행작으로 시장이 형성되지 않”기 때문이란다. 문득 의문이 밀려든다. 영화가 과연 그렇게 뒤늦게 한류에 올라탄 것일까?
어떤 관점(Viewpoint)에서 진단하느냐에 따라, 그 답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장규수 (2013)는 말했다. “한류가 발생한 지 10여 년이나 지났지만 제대로 된 자료를 찾기 힘든 현실이다. (중략) 심지어 한류에 대한 자료들을 살펴보면 잘못된 정보를 제공하는 경우도 많다”고. “이렇게 한류에 대한 연구도 제대로 되지 않은 상황에서 경제 논리를 앞세운 무분별한 산업적 접근과 계획성 없는 전시행정이 난립하며 한류가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쇠퇴하고 있다는 비판도 있다. 이런 현실을 볼 때 한류에 대한 정확한 사실 확인과 이론적 고찰이 시급하다”고. “경제 논리를 앞세운 무분별한” 산업적 시선으로 바라보면, 김중기의 진단은 옳다. 대중문화의 삼각축인 영화-대중음악-TV 드라마 중 제일 뒤늦게 그 바람에 올라탔으니 말이다.
그 기준은 으레 강제규 감독의 〈쉬리〉(1999)였다. 서울 244만 명에 전국 620만 명(제작사 주장 추정치)이라는, 당시로선 불가능에 가까웠던 흥행 성적을 일궈내며 한국 영화산업의 외연을 결정적으로 확대시킨 한국 영화사의 어떤 터닝포인트였다. 한국영화 사상 처음으로 서울 1백만 고지를 돌파한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1993)는 말할 것 없고, 당시까지 국내 개봉 역대 최고 흥행작이었던 제임스 카메론의 〈타이타닉〉(1997)의 기록 226만 명도 넘었다. 한국영화 역사는 〈쉬리〉 이전과 그 이후로 나뉜다는 평가가 나돈 것도 과장이 아니었다.
오늘날의 눈으로 평해도 마찬가지다. 박찬욱 감독의 〈공동경비구역 JSA〉(2000)와 곽경택의 〈친구〉(2001)도 그렇거니와, 국산 ‘천만 영화’ 1호인 강우석의 〈실미도〉(2003)를 비롯해 강제규의 〈태극기 휘날리며>(2004), 이준익의 〈왕의 남자〉(2005), 봉준호의 〈괴물〉(2006), 급기야 열아홉 번째 천만 영화 〈기생충〉(2019, 봉준호)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거의 다 ‘포스트-쉬리들’이라 일컬어져야 한다. 논란의 여지도 있고 일부 예외도 있으나, 한결같이 양적 규모만이 아니라 주목할 만한 질적 수준까지 겸비해 대중성과 (광의의) 예술성을 동시에 충족시거머쥐다킨 문제작들이다.
실은 저들 문제작들만이 아니다. 흔히 상업영화 대 예술영화로 양분되곤 하는 대다수 나라들의 영화들과는 달리, 한국영화는 전통적으로 흥행과 비평을 공히 사로잡은 영화들이 즐비했다. 윤여정의 스크린 데뷔작 〈화녀〉(1971, 김기영)를 비롯해 이장호의 〈별들의 고향〉(1974), 하길종의 〈바보들의 행진〉(1975), 김호선의 〈영자의 전성시대>(1975)와 〈겨울여자〉(1977) 등 우리 영화의 암흑기였다는 1970년대를 풍미했던 일군의 화제작들만이 아니다. 〈피아골〉(1955, 이강천), 〈자유부인〉(1956, 한형모), 〈시집가는 날〉(1956, 이병일), 〈지옥화〉(1958, 신상옥) 등 해방 후 산업 토대가 구축되기 시작한 1950년대가 낳은 일련의 수작들부터 코로나19가 극성을 부리던 2021년에도 360만여 명을 동원하며 한국영화 박스오피스 정상을 차지한 〈모가디슈〉(류승완)에 이르기까지, 적잖은 영화들이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데 성공해왔다. 그 최정점에 다름 아닌 〈기생충〉과 〈쉬리〉가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내수용을 넘어 해외 시장을 공략·개척하는 데 역사적 결실을 이뤄냈다는 데서도 상기 두 영화는 최정점들이다. 새 밀레니엄이 열리기도 전에, 심심치 않게 ‘염한’을 드러내기도 했던 전통 영화 강국에서 125만 명을 동원했다는 것은 진정 경이로운 성과였다. 〈쉬리〉를 기점으로 ‘영화 한류’를 말하는 것은 당연했다. 1993년 이후 줄곧 영화평론가의 길을 걸으며 한류를 몸소 관통해온 필자도, 그간 그런 견해에 동조했던 것은 그래서였다. 이 원고를 구상·준비해 마침내 쓰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지만, 소위 영화전문가로서 한류 논의에서 영화의 선두성 따위를 내세우고 싶지는 않았다고 할까. 그래서 관련 특강들을 할 때나 글들을 쓰면서도, 예의 상투적인 남들의 주장에 편승하곤 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여태 펼치지 않았던 주장을 감히 던지련다. 영화는 오락이요 산업임이 분명하나, 동시에 우리네 삶에서 그 어느 분야 못잖게 중요한 문화요, 엄연한 예술이니 말이다.
산업적 측면에서 눈을 돌려 문화·예술로서 영화라는 관점으로 파고 들어가면, 위 물음에 대한 답변은 달라진다. 1998년이 영화 한류의 어떤 변곡점으로 도드라진다. ‘제51회 칸영화제’에 우리 영화가 무려 4편이나 입성했기 때문이다. 한국영화 사상 최초로 단편 경쟁 부문에 진출한 (고)조은령 감독의 〈스케이트〉(1998)와 칸 공식 섹션 중 하나인 주목할 만한 시선에 초대받은 〈강원도의 힘〉(1998, 홍상수), 그리고 두 병행 섹션인 감독 주간과 비평가 주간에 초대된 〈아름다운 시절〉(1998, 이광모)과 〈8월의 크리스마스〉(1998, 허진호)가 그 주인공들이다. 대중적 흥행작과는 거리가 멀어도 예술성 면에서는 1990년대, 아니 우리네 영화 역사를 빛낸 수·걸작들이다.
당장 또 그 놈의 칸 타령을 하는 거냐는 반문·불만 등이 터져나올 수도 있을 테다. 지나친 사대주의 아니냐는 핀잔을 들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것은 칸의 위세를 모르기에 내뱉는 투정인 것도 사실이다. 칸영화제가 세계의 모든 국내외 영화제를 통틀어, 최고 권위·위상을 자랑한다는 것쯤은 상식이 된 지 수십 년이다. 말이 세계 3대 영화제이지, 베를린이나 베니스는 칸의 경쟁 상대가 안 된 지 오래다. 멀리는 1960년대, 가까이는 1980년대 이래 세계 영화 역사의 지형도를 그려온 주역은, 다른 그 무엇보다 최고 상인 황금종려상 등 칸영화제 트로피들의 향배였다. 그 영향력 면에서 베를린이나 베니스는 결코 칸에 비교되긴 역부족이다. 단적으로 2012년 ‘제69회 베니스영화제’ 대상인 황금사자상 수상작 〈피에타〉(2012, 김기덕)는 그 영예나 역사적 의의 면에서 2004년 ‘57회 칸영화제’ 2등 상 격인 심사위원대상작 〈올드보이〉(2003, 박찬욱)에 현저히 못 미친다. 예술적, 비평적으로나 대중적, 흥행적으로나….
봉준호의 〈살인의 추억〉(2003) 등 한국 영화사의 빛나는 수, 걸작들이 대거 선보이며 내셔널 시네마로서 한국영화(Korean Cinema)가 빅뱅을 일으켰던 2003년에 개봉된 〈올드보이〉는, 전국 330만에 달하는 큰 흥행 실적을 달성했을 뿐 아니라 비평적으로도 〈살인의 추억〉 못잖은 기념비적인 성취를 일궈냈다. 그 기세를 몰아 영화는 개봉작이건만, 칸 경쟁 부문에 입성해 2등 상을 거머쥐는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박찬욱의 B급 개성적 영화 세계를 한없이 사랑, 동경했던 동갑내기 감독 쿠엔틴 타란티노(〈펄프 픽션〉(1994))가 심사위원장이었기에 가능했던 쾌거였다. 그 수상 이후 감독 박찬욱만이 아니라 한국영화, 나아가 아시아 영화의 세계적 위상은 터닝포인트적으로 전환, 비상한다. 무게중심이 〈쉬리〉에서 〈올드보이〉로 이동하며, 한국영화는 물론 아시아 영화의 역사가 ‘그 이전’과 ‘그 이후’로 나뉘게 된다. 〈기생충〉이 2019년 ‘제72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거머쥔 데 이어 2020년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국제장편영화상에 이르는 4관왕에 등극하며 세계영화사를 새로 쓰기 전까지, 15년 동안 〈올드보이〉는 대중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거머쥔 독보적 아시아 영화였다. 단언컨대 ‘프리(Pre)-기생충’이었다. 그런 영화제에 한 해 4편이나 초대됐으니, 1998년을 영화 한류의 어떤 기점으로 간주, 주장해도 괜찮은 접근 아닐까.
아는가? 1998년 이전 칸의 부름을 받은 우리 영화 편수가 총 5편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이두용 감독의 〈여인 잔혹사, 물레야 물레야〉(1980)와 배용균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1989)이 각각 1984년과 1989년에 주목할 만한 시선에, 신상옥의 〈증발〉(1994)이 1994년 비경쟁 부문에, 양윤호 감독과 배우 박신양의 장편 데뷔작 〈유리〉(1996)가 1996년 비평가 주간에, 그리고 전수일의 〈내 안에 부는 바람〉(1997)이 ‘부산국제영화제’(이하 ‘부국제’) 출범 다음 해인 1997년 주목할 만한 시선에 초청된 것이 전부다.
일찍이 다른 지면에서도 물었듯, 이쯤에서 물어보자. 1998년 이전의 한국영화는, 십수 년간 칸에 고작 5편밖에 초대받지 못할 만큼 형편없었던 것일까. 홍상수의 최고작인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이 〈강원도의 힘〉 등 감독의 차기작들보다 수준이 떨어져 칸에 가지 못한 것일까.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굳이 강변할 필요 없을 터. 그보다는 우리 영화를 해외에 공격적으로 알릴 방법은 커녕 그런 시도조차 할 엄두조차 내지 못한 데다, 그럴 수 있는 창구, 요즘 말로 플랫폼조차 부재했기 때문에 그랬을 공산이 크다. 그 점에서 예의 부국제는 한국영화라는 미지의 내셔널 시네마는 물론, 다양한 국적의 아시아 영화를 세계 각국에, 특히 서구의 전통 영화 강국들에 두루 소개하고 홍보해준 최적의 ‘장(場)’이요 ‘창’이었다고 평하지 않을 길이 없다. 서구의 영화 선진국 중 부국제의 미래를 가장 먼저 내다보고 적극 성원해준 곳이 프랑스요 칸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영화 한류를 둘러싼 기존의 논의는 전격 수정돼야 하는 것 아닐까. 그래야 마땅하다. 이 원고는 그 시도 중 하나다. 영화 한류는 1998년에 이어 2000년에 또 다시 날아오른다. 〈공동경비구역 JSA〉(2000)의 해였던 그해, 한국영화의 국제적 위상은 전례 없이 격상된다. 무엇보다 임권택 감독의 〈춘향뎐〉(2000)이 우리 영화 사상 최초로 칸 경쟁작 대열에 진입했다. 현재의 시점으로는 별 게 아닐 수 있어도, 그때만 해도 한국영화의 ‘숙원’이 이뤄진 셈이었다.
영화는 빈손으로 돌아왔으나, 칸과 한국영화의 밀월관계는 한층 더 강해지고 깊어지리라는 것은 자명했다. 경쟁 부문 입성은 말할 것 없고, 수상도 시간문제였다. 〈춘향뎐〉 외에도 세 편이 그해 칸을 방문했다. 홍상수의 〈오! 수정〉(2000)이 주목할 만한 시선에, 1999년 ‘제4회 부산영화제’ 개막작으로 월드 프리미어된 이창동의 〈박하사탕>(2000)이 감독 주간에, 정지우의 도발적 장편 데뷔작 〈해피 엔드〉(1999)가 비평가 주간에 초청된 것이다. 1997년부터 2017년까지 1999년을 빼고는 20차례 칸을 찾았던 자타칭 ‘칸20’으로서, 칸의 현장 분위기를 생생히 기억하고는 있으나 상술하진 않으련다.
1998년을 기해 칸에서 전격 달아오르기 시작한 예술적 영화 한류는 2000년을 지나며 한층 더 뜨거워진다. 그 열기는 2000년대와 2010년대를 관통하며, 한국과 아시아의 영화를 넘어 세계의 영화 역사를 뒤흔드는 ‘〈기생충〉이라는 대사건’으로 나아간다. 2002년 〈취화선〉(2002, 임권택)의 감독상 수상을 필두로 2004년 〈올드보이〉(2003)를 거쳐, 2007년 〈밀양〉(2007, 이창동)의 여자연기상(전도연), 2009년 〈박쥐〉(2009, 박찬욱)의 심사위원상 등이 그 사이를 장식한다. 칸뿐이 아니다. 1987년 〈씨받이〉(1987, 임권택)의 강수연에게 여우주연상을 안겼던 베니스는 2002년 59회 때 〈오아시스〉(2002)의 문소리에게 신인배우상을, 이창동에게는 특별감독상을 수여한다. 김기덕은 2004년 한해 〈사마리아〉(2004)로 베를린 은곰상(감독상)을, 〈빈집〉(2003)으로는 베니스 은사자상(감독상)을 거머쥐는 기록적 성취를 올린다. 칸, 베를린, 베니스를 넘어 로테르담, 토론토, 카를로비바리 등 또 다른 세계 유수의 국제영화제로까지 시야를 넓히면 영화 한류의 증거들은 한층 더 늘어난다. 가령 홍상수는 데뷔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로 1997년 ‘제26회 로테르담국제영화제’ 최고상인 타이거상을 쥐는 파란을 일으킨 바 있다. 상황이 이런데도 “영화가 가장 늦게 한류에 편승했다”고 습관적으로 말해도 괜찮은 것일까?
3. 마치며
오해의 소지를 줄이기 위해 이 말은 강변해야겠다. 영화 보기 50여 년에 영화 스터디 40년, 영화 글쓰기 삼십 수년의 영화애호가이자 평론가로서 영화의 우위를 역설하려고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보다는 지나치게 산업적 측면, 달리 말해 돈벌이 위주로 한류 담론이 펼쳐지는 것은 한류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위해서도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 산업적 논의 못잖게 문화예술적 담론도 중요하다는 판단에서 여태까지와는 다른 시도를 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을 따름이다.
방탄소년단(BTS)과 〈기생충〉, 그리고 넷플릭스 오리지널 9부작 드라마 〈오징어 게임〉(2021)의 역사적 쾌거를 계기로 필자는, 한류를 단순히 ‘물결(Wave)’이나 ‘흐름’ 정도가 아니라 문명사적으로 짚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는 중이다. 작금의 한류는 다윈의 진화론 등에 입각한 약육강식, 적자생존을 넘어 21세의 융복합 시대에 부응하는 공존, 상생의 메시지, 세계관으로 범세계적 신드롬을 불러일으키고 있는바, 예의 낡은 패러다임으로는 더 이상 충분히 이해,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살아남기 위해 죽이지 않으면 안 될 절대절명의 순간에 주저하는 것을 넘어 스스로의 목숨을 내놓는 〈오징어 게임〉의 일부 캐릭터의 선택에, 개인주의와 합리주의에 기댄 삶을 살아온 대다수 서구인들이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김경동 KDI 국제정책대학원 초빙교수는 2006년에 이미, 《계간 철학과 현실》(여름, 69호) 특집 ‘세계화와 한류’에서 “‘한류’도 문명사적 의미가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며, “한류 읽기의 문법”으로 “문명사적 접근”을 제기한 바 있다. 그는 “근대화론을 다시 쓰기”와 “신근대화론의 눈으로 읽는 한류”를 제안했다. 놀랍지 않은가. 모쪼록 일찌감치 예술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확보했던 영화 한류를 통해 한류 논의 전반이 한층 더 깊어지고 커지기를 바라며, 이 문제제기적 글을 마치련다.
참고문헌
강준만 (2005). 『세계문화사전: 지식의 세계화를 위하여』. 서울: 인물과사상사.
김경동 (2006), 세계화와 한류, 《계간 철학과 현실》(여름, 69호).
윤호진 (2016). 『한류 20년, 대한민국 빅 콘텐츠』 . 서울: 커뮤니케이션북스.
장규수 (2013). 『한류와 아시아류』, 서울: 커뮤니케이션북스.
글ㅣ전찬일 영화평론가, 중앙대학교 글로벌예술학부 겸임교수
(출처 : 한류NOW 2022년 3+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