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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한류의 견인차 국제영화제

  • [등록일]2023-01-25
  • [조회] 13520

영화한류의 견인차

국제영화제





칸국제영화제에서 지난해에 호명된 한국영화들을 떠올린다. 가장 먼저 경쟁 부문의 <헤어질 결심>(2022)과 <브로커>(2022), 다음으로 비평가주간의 <다음 소희>(2023), 그리고 미드나잇 스크리닝 부문에 초대되었던 <헌트>(2022)가 생각난다. 칸영화제와 같은 주요한 국제무대에서 한국영화가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임권택 감독의 <취화선>(2002) 이후부터였다. 이 작품은 제55회 칸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했고, 본격적으로 한국영화의 전통성을 서구에 알리는 데 기여했다. 아드리앙 공보의 언급처럼 “2000년을 분기점으로 한국영화가 해외여행을 시작함으로써” 본격적인 영화 분야의 한류가 출발했음을 2000년대 초반 국제영화제의 성과는 이르고 있었다. ‘국제영화제’는 분명히 일반적인 행사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른바 ‘영화한류’의 견인차로써, 국제영화제의 활용도에 대해 고민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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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인 이미지 출처: 셔터스톡



1. 국제영화제를 통해 새롭게 부각된 영화연출자들


1988년 할리우드 영화의 직배가 허용된 이후, 국내 영화시장은 ‘국가 간 공정거래’라는 자유경쟁 체제로 변모했다. 정책이 바뀌면서 영화제작자들의 태도 역시 바뀌었다. 규모 면에서 국내 영화시장은 할리우드 대작들과 경쟁할 수 있는 이른바 ‘블록버스터 형식’으로 포맷화됐고, 대기업과 금융자본 중심으로 영화계 재편이 이루어졌다. 자본 규모가 커지면서 국내 영화 제작자들은 국제적인 경쟁이 가능한 구조로 바뀌려고 노력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이 과정에서 예술영화 시장 규모도 확장됐다. 언뜻 이러한 경향은 산업화와 맞물린 우연한 효과처럼 보이지만,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사회적이고 정책적인 요소가 산업적인 측면과 맞물려 복합적으로 이루어낸 성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980년대 초반까지 충무로는 일종의 견습생 제도를 통상적으로 유지하려 했다. 그렇지만 대기업이 영화산업에 뛰어들면서, 산업 체계의 체질은 전반적으로 변화했다. 해외 평자들은 이를 1990년대 말 ‘스크린쿼터의 과정’에서 이전 세대 영화제작자들과 젊은 영화인들이 합심하며 바뀐 결과라고 소개하는데, 어떤 식으로 말하더라도 그 결과는 ‘외부 세력’의 영향에 의한 변화라는 점에서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또한 이 시기에 국내 영화 연출가들은 대거 해외영화제에 진출했다. 임권택, 박광수 같은 기존 거장들이 일부 포함되어 있었지만, 대개는 새로운 이름들이었다. 어쩌면 할리우드로부터 기인한 산업적인 측면에서의 압박감이 오히려 한국영화의 부흥을 불러온 듯 보인 정도였다. FIAPF(세계영화제작자연맹)가 인정한 ‘세계 3대 국제영화제’에 초청된 한국의 장편영화 목록을 통해서도 이점은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2. 사실적이고 사회적 성향의 K-무비


19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서방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한 한국영화의 미학적 성향은 국제영화제에서의 활약을 통해 조금씩 그 다양성을 인정받았다. 그 선두에는 이창동과 김기덕, 홍상수의 영화들이 있었다. 박광수의 <그 섬에 가고 싶다>(1993)에 조연출로 참여한 경력 때문에 이창동은 일종의 ‘도제 시스템’을 경험한 연출자로 구분됐다. 하지만 김기덕과 홍상수는 달랐다. 그들은 순전히 ‘국제영화제’의 인증을 통해 국내 활동이 더 원활해진 사례에 속했다. 국제무대에서의 성과와 비교할 때 국내 극장 흥행수익이 높은 편이 아니었기에, 그들 영화의 예술성은 좀 더 부각된 측면이 있었다. 김기덕의 경우, 프랑스에서 방랑 화가로 생활했던 것이 알려지며 독특한 영화 세계가 더욱 주목받을 수 있었다. 한편, 홍상수는 영화학을 전공했지만 단편영화제 수상 경력을 통해 알려진 것은 아니었기에 ‘혜성 같은 등장’으로 비평계를 술렁이게 만들었다. 홍상수의 데뷔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이 보여준 독특한 사실주의의 질감은 비평가들 사이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90년대 후반, 국제영화제들이 이와 같은 새로운 한국의 연출자들을 꾸준히 호명했다. 위 도표에 표시되지 않은 수많은 작품도 이 행렬에 동참했다. 이를테면 <칠수와 만수>(1988)의 로카르노국제영화제 젊은비평가상 수상, <아제 아제 바라아제>(1989)의 모스크바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 그리고 배용균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1989)이 로카르노국영화제 최우수작품상을 받은 사실은 당대 한국영화 전반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특히 대기업 중심의 상업영화 회로에서 이들 영화가 파생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영화사적으로 의미 있어 보였다. 그리고 마침내 2000년대 초반, 칸국제영화제(이하 ‘칸영화제’)를 비롯한 세계 3대 주요 영화제에서 한국영화에 대한 폭발적인 관심이 집중됐다. ‘표1’은 당대의 상황을 정리한 내용이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조금씩 세계시장에 한국영화의 존재를 알린 기존의 거장들은 2000년대가 되어 후배 감독들에게 서서히 자리를 내주었다. 임권택 등 기존의 감독들이 무대에서 내려왔고, 김기덕과 홍상수, 박찬욱의 이름이 해외영화제의 새로운 목록을 채웠다. 그리고 이들의 활동은 이전보다 훨씬 더 자주 국제무대에 소환됐다. 소위 ‘K-무비의 흐름’이 본격적으로 감지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공통적으로 이들은 새로운 한국영화의 미학, 보다 넓은 의미에서 한국적 리얼리즘을 탐색하고 있는 듯 보였다.

인간과 풍경이 유기적으로 묘사된 ‘현실사회의 표현’은 예를 들어 <수취인불명>(2001)의 혼혈아 서사, <공동경비구역 JSA>(2000)의 분단 상황 묘사, <바람난 가족>(2003) 속 여성 서사 방식을 통해서도 다채롭게 드러났다. 이들 영화는 기존의 상업영화처럼 개인의 성장이나 묘사에 집중하지 않았다. 대신 사회를 둘러싼 외부적인 상황에 몰두했다. 실제로 <올드보이>(2004)를 보고 난 뒤 프랑스의 어느 평론가는 “1990년대 한국의 주요 과제인 질식하는 먼지층을 쓸어버리는, 격렬한 기류의 감각적이고 잔인한 해방의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영화라는 평을 남기기도 했다. 주요한 캐릭터들이 사회와 환경에 융합되어서 비인간적 현실의 세계관을 지적한다는 면에서, 당대 박찬욱과 임상수의 영화는 미학보다 사회의 본질에 더 관심을 보이는 듯 여겨졌다.


3. K-무비의 새로운 역사, 봉준호


생각해보면 <오아시스>(2002)나 <밀양>(2007)과 같은 이창동의 영화는 한국사회의 특수한 상황에만 오롯이 집중한다. 예를 들어 <오아시스>는 장애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지적하는 작품이고, <밀양>은 독특한 지역의 성향 및 종교적 습성에 몰입하는 영화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박쥐>(2009)나 <아가씨>(2016)와 같은 박찬욱의 작품들 또한 사회적인 시선을 강조해 보인다. 박찬욱의 경우 특유의 아나키즘적 성향을 바탕으로 지속적으로 동양문화를 융합하며 외세의 침입을 지적한다는 것이 특징적이었다. <하녀>(2010)나 <돈의 맛>(2012)과 같은 임상수의 영화들은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높이 평가됐다. 임상수는 다만 박찬욱과 달리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몰지각한 현실 상황을 보다 시각적이고 통속적으로 표현하는 데 있어 재능이 있는 연출자였다. 이른바 공간의 숨결에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아낸다는 입장에서, 2000년대 그들의 영화는 사회적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2010년대 초반, 한국영화는 기존의 성과를 뛰어넘지 못하고 한동안 제자리걸음을 유지한다. 김기덕의 행보가 대표적이다. 영화 <피에타>(2012)가 제69회 베니스국제영화제(이하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이후, 그는 제작자로서 꽤 많은 작품에 참여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리고 홍상수의 경우 매해 새로운 작품을 내놓으며 베를린국제영화제를 중심으로 활동했지만, 이러한 그의 모습을 ‘또 다른 성장’이라 부르기는 어렵다. 이미 웅장해질 만큼 웅장해진 K-무비의 위상에서 다만 인증된 아트하우스의 군주로 그는 군림했을 따름이었다.

이즈음 봉준호의 행보가 단연 부각되었다. 기존에도 봉준호는 여러 영화를 통해 해외에서 활동하고 있었지만, 영화 <기생충>(2019)이 보여준 국제적인 성취는 놀라울 만큼 대단했다. 2019년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기생충>은 한국영화사에 길이 남을 걸작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게다가 이 작품은 이듬해 미국 ‘아카데미시상식’에서 작품상과 감독상, 국제영화상, 각본상 등 4개 부문의 수상작으로 선정되면서 다시금 파란을 일으켰다. 명실공히 K-무비의 위상을 전 세계에 알리는 데 공헌했던 것이다. 봉준호의 <기생충>을 통해 이른바 한국적 리얼리즘의 정점은 사회적이고 리듬감 있는 ‘웰메이드 K-드라마’의 색채로 완연히 채워졌다.



4. 칸영화제를 통해 본 국제영화제의 성향


영화제(film festival)는 분명히 일반적인 행사(event)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축제의 일환이다. 이에 대한 정확한 이유는 ‘영화제’라는 제도가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한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상황을 돌아보는 것이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것이다. 사실상 영화시상식은 영화애호(cinephile)의 행위와는 구분되는 행사이다. 초창기 국제영화제가 순수하게 ‘상영’을 목적으로 기획되지 않았다는 점은 이를 명시한다. 전후 유럽에서 국제영화제들이 조직될 무렵, 대부분의 영화제는 공공기관에서 자금을 조달했다. 칸영화제도 마찬가지였다. 첫 번째 칸영화제 행사는 외교통상부와 공보부, 교육부가 주관하여 진행되었고, 국가의 입장에서 이와 같은 이벤트는 일종의 ‘축제 외교(festival diplomacy)’의 일환으로 취급받았다. 때문에 1946년 작성된 규정 제2조는 칸영화제의 목표를 “모든 형태의 영화 예술 발전을 장려하고 영화 제작 국가 간의 협력 정신을 창출하는 것”이라고 명시했다. 재발견된 평화 상황을 유지하기 위해, 당시 유럽의 주요 국가들은 국가 주도로 국제영화제를 활용했고, 칸영화제는 경쟁 행사였던 베니스국제영화제와 비교해서 노선을 수정하면서까지 국제영화제 진행에 최선을 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