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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국제예술축제에서 펼쳐진 한국인의 정서 ‘한(恨)’
어두운 빛 아래, 바이올린 소리와 무용수가 숨을 내쉬면서 물결을 출렁이는 듯한 모습으로 무대 위의 공연이 시작된다. 각자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을 움직임을 통해 표현하며 관객과 이야기 한다. <심연 Abyss> 공연은 삶의 희노애락 중 슬플 애(哀), 슬픔을 춤으로 노래하듯 표현한 애가(哀歌)이다. 물질적 풍요 속에서 정서적 공허함을 해결하지 못하는 이 시대의 많은 사람들을 망망대해 위 돛단배로 표현하며, 한국인의 정서 ‘한(恨)’을 담고 있다.
지난 19일부터 6월 4일까지 진행된 싱가포르 국제예술축제(Singapore International Festival of Arts, SIFA)에서 99아트컴퍼니의 <심연 Abyss> 공연이 펼쳐졌다. SIFA는 1977년 싱가포르 국립예술위원회의 비영리 산하기관인 아트하우스(Arts House Limited)가 주관하며 매년 5월 싱가포르 공연계를 뜨겁게 달구는 대표 공연예술 축제이다. SIFA는 올해 무용, 다원예술, 연극 서커스 등 총 20여 편의 작품을 소개한다. 특히 한국의 <심연 Abyss> 작품은 SIAF에서 해외 초청작을 소개하는 ‘CREATION’ 이라는 섹션을 통해 선보이게 되어 뜻깊은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2023 SIFA 에서 주목할 점은 다양한 장르의 아티스트와의 협업이다. ‘Prompt:play’는 공연예술 현장을 작가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이를 글로 표현하며 예술의 가치와 의미를 관객과 나누고 환류 하는 프로그램이다.
이번 싱가포르 국제예술축제의 99 아트컴퍼니 <심연 Abyss>은 2019년 트래블링 코리안 아츠 프로그램 풀에 선정된 작품이다. 한국인의 정서 한(恨)을 담은 본 작품은 싱가포르 현지에서 관객들의 뜨거운 반응을 이끌었다. 싱가포르 시인이자 수필가, 그리고 ‘Critics Circle Blog’(싱가포르에서 공연예술을 다양한 시각으로 바라보고, 표현하는 온라인 플랫폼)에서 비평가로 활동하는 ‘모크 징(Mok Zining)’의 시선으로 바라본 <심연 Abyss>공연 리뷰를 들어 보았다.
SIFA 2023 99아트컴퍼니 <심연> 트레일러 보러가기
커튼이 올라가면서 바이올린의 애끓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무대 중앙의 무용수는 숨을 들이쉬고 내쉬면서 마치 물결이 출렁이는 듯한 모습을 연출한다. 그녀의 쭉 뻗은 팔 끝에는 어린 시절 누구나 한번쯤 접는 법을 배웠을 법한 하얀색 종이배가 떠있고, 무용수의 숨결에 따라 일렁인다. 이 종이배는 망망대해의 어둠 속을 홀로 항해하고 있다.
99아트컴퍼니<심연 Abyss>의 막이 올랐다. 이 작품은 전쟁과 식민주의를 겪은 한국인들의 억울함, 슬픔, 분노의 감정인 한(恨)과 실존적 공허 등 다양한 애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어둠 속에 앉아, 공연에 대한 감상으로 이후 기록할 만한 요소들을 마음속에 새겼다. 배가 항해하고, 바이올린 선율 사이로 희미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무용수의 입술이 구호를 외치는 것처럼 움직였다. 무대 왼쪽에서 백지로 만든 한복을 입은 한 인물이 등장해 천천히 무대를 돌기 시작한다. 이 인물 역시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후 무대 왼쪽에서 정주(놋그릇으로 만들어져 울림이 길고 맑고 높은 소리를 내는 한국 타악기)와 종이배를 각기 들고 있는 무용수 그룹이 등장할 때까지, 동일한 구호를 외치는 소리가 여러 번 반복되는 가운데 점차 켜져 갔다. 하얀 한복을 입고, 이제는 바닥에 앉아있는 인물 앞에 무용수들은 차례대로 그들의 정주를 내려놓았다.
이후 부름과 응답의 행위가 이어졌다. 정주을 치는 첫 소리에 무용수들은 일제히 움직임을 멈추었고, 두 번째 소리가 들리자, 모두가 동일한 안무를 선보였다. 세번째, 네번째 계속되는 정주 소리에 매번 다른 동작들이 연출된다. 정주를 치는 소리 사이 사이 진동하는 침묵 속에서, 안전하고 친밀한 사적 공간에서나 들릴 만한 산발적 신음, 탄성, 헐떡거림 등의 숨소리가 공간을 장악한다. 흥미로웠다. 정주를 치는 소리로 형성된 구조 속에서 애환에 대한 거리낌없는 표현(분명 의도된 것이겠지만)이 자유롭게 이루어졌다. 이는 마치 무용수들이 슬픔의 의식에 참여하고 있는 듯 느껴졌다.
부름과 응답의 행위가 고조되면서 하얀 한복을 입은 인물이 노래를 시작했다. 처음에 부드럽게 시작된 노래는 점차 구슬픈 장송곡으로 변해갔다. 노래가 점차 격렬해지자, 노래의 피 끓는 애통함에 응답이라도 하듯 무용수들이 몸을 들썩이고 거친 호흡을 내뱉었다. 마침내, 노래와 비명 소리로 극장 내 공기가 팽팽해지는 순간, 나는 당황스럽게도 울고 있었다. 허를 찔린 나는 옆자리 관객에게 들키지 않도록 등을 돌려 마음을 가다듬었다. 무대에는 종이배들이 떠 다니고 있었다. 공연자들의 몸짓과 목소리에 따라 내 가슴 속 무엇인가가 치밀어 올랐다.
나는 작품의 의도대로 이해하고 관련된 글을 쓰기 위해 공연을 보러 왔다. 하지만, 공연을 보는 내내 파도에 쓸려가듯 몸이 들썩여졌고, 내 할머니와, 남중국해를 건너던 그녀의 여정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2차 대전 직후, 할머니가 유일하게 알던 장소가 돌이킬 수 없는 변화의 국면으로 치닫자, 할머니는 망망대해를 건너 낯선 곳으로 향했다. 나는 그 시절 젊은 할머니에 대해 생각했다. 할머니는 뱃멀미로 갑판에서 힘든 시간을 보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그녀가 상당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을 거란 사실이다. 어느 조용한 오후, 할머니는 갑판에서 물속으로 던져진 병자들에 대해 나에게 말해주었다. 나는 그때 그녀의 눈 속에 떠오른 공포를 기억한다. 내가 느끼기에 우리는 나의 어린 시절 집 소파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꿈속에서 늘 그러듯 상황은 순식간에 바뀌어, 지금 나는 개인보호장비를 갖춘 채 코로나 병동에서 할머니의 뻣뻣한 손을 잡고 통제 불능의 상태로 울고 있다. 내 휴대폰 화면 속 가족들 역시, 격리된 장소에서 조용히 흐느끼고 있다.
극장에서는 작품을 있는 그대로 감상하지 못하고 개인적인 기억을 작품에 투영시키는 나 자신에게 짜증이 났다. 하지만 글을 쓰는 지금, 애환의 경험을 공유하려는 작품의 초대에 내가 응한 것은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공연 후 대화에서, 숨소리를 작품에 담게 된 배경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안무가 장혜림에 따르면, 이 작품 연구단계에서 그녀와 그녀의 안무팀은 어두운 스튜디오에 앉아 서로의 숨소리를 느껴보려 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그녀는 스튜디오 내 공기의 변화를 감지했고, 그 순간 <심연 Abyss>에 숨소리가 필수적이라고 확신했다.
나 역시 몇 년 전 내가 존경해 마지않던 발레 교사 M의 추모식에서 이러한 공간의 변화를 본능적으로 감지했다. 마지막 추모의 순간, 마치 슬픔이 그곳에 있던 모든 이들을 관통하듯 공기가 진동했으며, 익숙하고 평범한 스튜디오는 신성한 장소로 변모하였다. 슬픔은 우리 몸 안에 존재하는듯 하지만, 동시에 상당히 사회적인 특성이 있다. 슬픔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육체를 관통하며 순회한다. 이는 물려받은 것인 동시에 전승되며, 받아들여지는 것이고 또한 진화한다.
이러한 이유로 <심연 Abyss>은 마법과도 같은 공연이라고 할 수 있다. 35분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다른 관객과 더불어 한(恨)의 감정을 느끼고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이 창조된다. 한(恨)이 한국 역사와 문화의 특수성에 기반한 감정임에도 불구하고, 내 육체의 리듬과 공명한다는 사실에 놀라웠다. 한(恨)의 경우와 같이, 싱가포르 또는 시노폰(Sinophone, 중국어를 사용하는 사람)만의 고유한 민족적 슬픔을 우리가 이야기할 수 있을지 나는 의문이 들었다.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아직 찾지 못했고 여전히 숙고 중이다. 나는 할머니로부터 어떠한 슬픔을 물려받았을까? 그리고 어린 시절 싱가포르에서는 또 어떠한 슬픔을 체득하게 되었을까? 딸, 친구, 부모, 작가로서 또한, 격변 시기의 한 인간으로서 공유하고 있는 슬픔은 무엇일까? 여기, 당신과 나, 우리가 함께 공유하는 이 공간에는 어떠한 슬픔의 감정이 흐르고 있는 것일까?
원문 바로보기 Grieve:ASpell,ASpace(sifa.sg)
싱가포르 국제예술축제 99 아트컴퍼니 <심연> 공연은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의 트래블링 코리안 아츠 사업의 일환으로 추진되었습니다. 2015년 시작된 트래블링 코리안 아츠 사업은 한국의 문화예술의 동시대성을 보여줄 수 있는 공연 및 전시의 해외순회를 지원하는 사업입니다. 해외 문화예술 기관 및 재외한국문화원과 협업을 통해 한국 문화예술의 인지도를 제고하고, 문화 교류를 활성화하고자 합니다.
글 교류기획팀·모크 징(Mok Zining) / 사진 제공: SIFA(싱가포르 국제예술축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