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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트 모던, 영국현대미술관에서
제인 진 카이젠의 영상 작품 영국 최초 상영
글 김현화 작가 (런던거주작가, 홍익대학교 / 센트럴 세인트 마틴(UAL) 석사 졸업)
진흥원이 주관하는 2023 코리아시즌 일환으로 제주 출신 미술작가 제인 진 카이젠(Jane Jin Kaisen)의 신작 3편이 영국현대미술관 테이트 모던(Tate Modern Museum)의 특별 기획전 《디스로케이션 블루스》(Dislocation Blues)를 통해 발표되었다. 영국에서 처음으로 소개하는 카이젠 작가의 작품이 일반 관객뿐만 아니라 앨런 마이클슨, 리처드 벨, 수바시 테베 림부 등 세계적 예술가들의 주목을 받았다.
《디스로케이션 블루스》는 테이트 모던 터빈 홀에 설치된 리처드 벨(Richard Bell)의 작품이 갖는 정치·사회적 배경과 연계해 다국적인 저항 운동에 참여하는 예술가들의 작품을 3일간(5월 25일~27일) 소개하는 기획전으로, 제인 진 카이젠을 비롯해 우즈베키스탄 영화감독인 사오닷 이스마일로바의 작품과 여러 단편 작품이 소개되었다.
상영관 내에 들어서자마자 들리는 굿 소리는 아직 상영하지 않은 작가의 작품에 관객들에게 심적 접근을 유도하는 듯했다. 작가의 설명에 따르면 이 소리는 작가가 거의 10년간 함께 일해 온 고(故) 고순안 심방(제주도에서 무당을 가리키는 무속 용어)의 굿 소리를 발췌한 것이다. 작가의 2019년 베니스 비엔날레 출품작 <이별에 공동체>에 직접 출연해 중요한 역할을 했던 그녀는 안타깝게도 이 작품이 완성된 지 몇 주 후에 세상을 떠났다. 무속인으로서의 그녀의 삶과 지식은 무속 서사시로 구전 및 전승되고 있다. 작가는 그녀와의 협업을 통해 발견한 제주 샤머니즘에 대한 관심을 영적 역사와 우주론으로 확장해 가면서 작품의 세계관을 구축했다. 또한 테이트 모던에서 새로운 작품을 발표했던 지난 2023년 5월 25일은 고순안 심방이 세상을 떠난 지 정확히 4년이 되는 날로 그녀의 목소리가 현장에 퍼진다는 것이 작가에게도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첫 번째 작품 <매장된 질서>(Burial of this Order, 2023)는 제주 4.3 사건 등 탄압과 반란의 역사를 환기하는 주제로, 폐허가 된 제주도 리조트로 관을 운반하는 순응하지 않는 사람들(예술가, 반군국주의자, 환경운동가 등)의 행렬을 장례, 정치적 시위, 축제의 모습으로 표현했다.
두 번째 작품인 <제물-감고, 포용하다>(Offering - Coil Embrace, 2023)은 제주의 무속 신화, 삶과 죽음의 순환 등을 다루고 있다. 환경보호 활동을 하는 잠수부들과 작가가 함께 바다와 관련된 제주 무속 신화와 소창의 상징적 의미를 끌어내는 수중 안무를 구성하고 이를 유려한 카메라 움직임으로 담아내었다. ‘소창’은 평직으로 성글게 짠 길고 흰 무명천으로 인간의 삶과 죽음의 순환을 상징하는데 한국의 통과의례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이다. 슬로우 모션으로 촬영되어 점차 붉게 물들어가는 화면구성은 바다를 매체이자 조상의 지식과 모계 연결의 그릇으로 다루면서, 동시에 망명과 죽음의 공간을 상징한다.
마지막 작품 <할망>(Halmang, 2023)은 제주도에서 무속 신당 역할을 하는 작은 화산섬을 배경으로 70·80대의 해녀 여덟 명이 옷감을 연결하는 모습으로 연출되었다. 12분 길이의 이 영상은 작가 본인의 조부모인 할머니의 삶이기도 했던 해녀로서의 인생과 경험, 공동체 의식, 바람과 바다와 같은 환경과의 연계성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상영 이후 진행된 관객과 작가 간의 대화를 통해 작품에 대한 의미와 제작 과정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질문: 작품의 정신과 이야기의 중심인 제주도가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요?
제가 태어난 곳이기도 한 제주도는 섬이라는 지리적 조건 때문에 한국 내륙지역의 문화적 풍습과는 다른 모습으로 오랜 시간 만들어진 제주만의 정치적 역사, 샤머니즘의 형태를 가집니다. 제주에 관한 연구를 시작하면서 제주 4.3 사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승과 저승을 이어주면서 망자를 애도하는 무속인 심방과의 만남과 대화를 통해 현재와 같은 작품의 형태로 발전시켰습니다. 제주의 무속문화는 내륙지역의 무속 형태와 달리 해양 문화에서 다양하게 존재하는 신화들과 무속이 만나, 현실에서의 고난과 안녕을 빌고 비는 대상이 된 것이지요.
질문: <매장된 질서>(Burial of this Order)과 <제물-감고, 포용하다>(Offering - Coil Embrace) 작업 과정이 궁금합니다.
<매장된 질서>는 제가 구성한 전체 내용 외에 촬영 당일 참여자와의 논의로 인해 만들어진 부분들이 꽤 있습니다. 또 원테이크로 제작된 관계로 신화 속 도깨비 신들이 건물을 통과하는 장면과 지배적인 질서를 전복하고 해체하는 과정 등 무리를 지어 매장의식을 거행하는 참여자들의 전체 연기에 자연스럽게 따라가는 촬영과정이었습니다.
<제물-감고, 포용하다>의 촬영은 6일간 이루어졌는데 사전에 제작팀이 많은 준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수중촬영으로 인해 예측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상황이 있었습니다. 해류, 바람, 만조와 간조의 시간 변화 등 촬영 당일의 바다 환경으로 많은 변수가 있었고 또 조명을 따로 쓰지 않았기 때문에 날씨로 인한 영향도 컸습니다. 결국 이 작품은 그때 주어진 환경의 조건을 그래도 담아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질문: 왠지 다른 작품에 비해 <할망>(Halmang)에서 참여자와의 커뮤니케이션이 쉽지 않았을거 같은데, 어떻게 이루어졌습니까?
다른 두 작품과 달리 <할망> 참여자들은 연기라고 보기 힘듭니다. 해녀 여덟 명이 같이 한 그룹으로 모여앉아 소창을 세심하게 접고, 손질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다시 그것이 펼쳐져 검은 용암 바위를 감싸 큰 나선형을 만드는 과정을 천천히 보여줍니다. 십 대부터 생의 대부분을 해녀로 같이 살아온 이들에게 익숙하고 안전한 공간인 이 바위 위에선 공동체 의식에서 자연스레 나오는 그들만의 행위를 계획된 구성 없이 담담히 담아냈습니다.
작가는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디스로케이션 블루스》의 일환으로 이번에 선보인 세 개의 단편 작품과 함께 지금까지 진행해 온 프로젝트와 지속적 연속성을 가진 두 편의 작품을 추가로 제작할 것이라고 한다. 또한 제주 지역의 역사와 정신문화에 관한 오랜 연구와 작업 활동을 바탕으로 장편 작품을 제작할 계획도 가지고 있다. 추가로 이번 여름과 가을에 걸쳐 작품 《이별의 공동체》가 타이베이 시립 미술관에서 선보이고, 《디스로케이션 블루스》를 통해 발표된 작품들은 밀라노 아카이브, 뉴욕 더 브루클린 레일(The Brooklyn Rail), 대만 홍가미술관(Hong-Gah Museum)에서도 소개될 예정이다.
제인 진 카이젠(b.1980, 제주)은 코펜하겐에 거주하며 작업한다. 영상 설치, 실험 영화, 사진, 퍼포먼스, 텍스트를 다루는 카이젠의 작업은 광범위한 다학제적 연구와 공동체의 참여에 기반하며, 다층적이고 수행적이며 시적인 다성의 페미니스트 작업을 통해 과거와 현재를 연결한다. 카이젠은 기억과 이주, 경계, 번역 등의 주제에 관심을 갖고 주관적 경험과 체화된 지식이 광범위한 정치사와 교차하는 영역을 불러낸다. 카이젠은 제 58회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전시 (2019)에 참여했으며, 쿤스트할샤를로텐부르크에서 가진 개인전 《이별의 공동체》(2020)가 AICA 덴마크 미술비평국제협회가 선정한 ‘2020 올해의 전시’로 선정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