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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쿠바 전격 수교, 배경엔 한류의 파급력이?
글 서병기 선임기자(헤럴드경제 대중문화)
한국이 지난 2월 14일 미국 뉴욕에서 미수교국이던 쿠바와 대사급 정식 외교관계를 맺었다. 1992년 8월 한·중 수교 뉴스때 느낀 감정과 유사한 기분이 들 정도로 확 띄는 뉴스였다.
쿠바에서의 한인역사는 러일전쟁(1904년 2월 8일~1905년 9월 5일)이 한창이던 1905년 4월 멕시코 유카탄반도의 애니깽(용설란) 농장에서 올린 구인광고를 보고 한인들이 멕시코에 들어갔고, 이들 중 288명이 1921년에 사탕수수 농장에서 큰 돈을 벌기위해 쿠바로 다시 들어감으로써 시작됐다. 초기 쿠바에서의 한인 모습은 2019년 한국계 미국 시민권자인 전후석 감독이 제작했던 다큐멘터리 영화 ‘헤로니모(Jeronimo)-쿠바혁명에서 싸운 한인’에 잘 나타나있다.
전후석 감독은 쿠바에 5차례 방문하며 2년여에 걸쳐 쿠바 한인들의 흔적을 따라가며 그들의 정체성 문제를 다룬 93분짜리 다큐영화를 완성했다. 전 감독은 “우연한 기회에 쿠바 배낭여행을 가서 한 한인 가정에 초청받아 감동을 받았다. 이방인에게 김치와 파전을 내놓는, 말도 안되는 대접을 받았고, 그 분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영화제작은 마치 운명같은 프로젝트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 곳에서 쿠바 한인의 정신적 지주인 고(故) ‘헤로니모 임’(Jeronimo Lim Kim 1926~2006, 한국명 임은조)의 딸 파트리시아 임(55)을 만나며 ‘헤로니모’에 대한 영화를 만들게 됐다. 4개국 17개 도시를 돌며 헤로니모의 형제자매, 사촌, 친구, 재미교포 역사학자 등 총 70여명을 인터뷰했다.
“헤로니모 임은 한마디로 쿠바 한인의 정신적 지주, ‘쿠바의 안창호’라고 말할 수 있다.
부친인 애국지사 임천택(1903~1985) 전 쿠바한인회장은 애네켄 농장에 팔려온 반 강제 노예였다.
헤로니모는 찢어지게 가난한 부모님 등 300명을 보면서
정의로운 삶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공부도 하고 사회운동에 참여한다.
헤로니모는 남미 최고 대학중 하나인 아바나 법대를 다녔는데,
동기 중 한 명이 쿠바혁명의 주역이자 49년간 쿠바를 통치한 피델 카스트로였다.”
헤로니모 임의 부친인 임천택 등 한인근로자들은 사탕수수밭과 애니깽 농장에서 힘들게 일해 번 돈을 임시정부에 독립 자금으로 보내기도 했다. 헤로니모도 퇴임 뒤에 쿠바 한인들의 정체성을 수립하기 위해 한글학교를 건립하고, 쿠바 한인사회 재건을 위해 헌신했다고 한다.
현재 쿠바에는 이민 6세까지 1000명 정도의 한인이 살고 있는데, 4세 이후는 100% 혼혈이며 한국어를 거의 구사하지 못한다. 세대가 내려갈수록 한국인에 대한 정체성이 사라지지만 한국과 쿠바의 수교로 이들이 정체성을 유지하고 본국과의 관계도 더욱 가까워질 수 있게 됐다. 한국과 쿠바는 이처럼 오랜 관계가 있음에도 체감상 멀리 느껴지는 것은 1959년 1월 피델 카스트로의 공산 혁명 성공에 이어 1960년 8월 쿠바와 북한의 수교로 미-소 냉전체제에서는 교류가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다 2005년 코트라 아바나무역관이 개설되고, 2015년 7월에는 미국과 쿠바가 수교하는 등 국제정치 무역 질서는 바뀌어갔다. 2016년에는 윤병세 한국 외무부 장관이 아바나를 공식 방문해 쿠바 외교장관과 회담을 나누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한국과 쿠바가 가까워진 것은 바로 문화의 힘이었다. K-팝, K-드라마 등 한류는 이미 쿠바인들에게는 큰 인기를 얻었다. 이번 수교에 있어서도 한류가 큰 역할을 했음은 물론이다. 우리에게도 쿠바는 카리브해의 멋진 자연을 배경으로 하는 고장으로서만 아니라, 다큐멘터리 영화 ‘부에나 비스타 소셜클럽’으로 소개된 재즈음악들, 그리고 빠른 비트의 살사 등은 여전히 매력적인 콘텐츠로 환영받고 있다.
쿠바는 중남미 한류 열풍의 중요한 거점 역할을 하고 있다. 2013년부터 한국 드라마가 본격적으로 방영되고 있으며, K-팝 등 K-컬처가 뿌리내리고 있다. 해외에서 이같은 한류 현상을 활성화시킨 주역은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이하 ‘진흥원’)이 추진해온 ‘해외 한류 커뮤니티 활성화’ 사업이다. 한국문화를 사랑하여 세계 각지에서 자발적으로 모여 활발한 활동을 펼치는 ‘한류 커뮤니티’는 1,500여 개에 이르고 회원 규모가 1억 5천 명을 돌파했다.
각 나라와 한국의 가교 역할을 자처하며 지역의 특색에 맞게 한국문화를 소개하는 사람들의 중요성이 점차 높아지고 있음을 간파한 문화체육관광부와 진흥원은 2012년부터 ‘해외 한류 커뮤니티 활성화’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전 세계 한류 커뮤니티들의 자생적 성장과 네트워크 강화를 위한 다양한 지원 활동을 펼쳐 왔다. 2023년에도 벨기에, 아랍에미리트, 아르헨티나, 인도, 튀르키예 등 총 18개국 38개 커뮤니티가 선정되어 모임을 결성하고 자체 행사를 주최하는 등 눈부신 활동을 이어나가는 중이다.
쿠바의 ‘아르코르’(ARTCOR) 커뮤니티도 그중 하나이다. 한국의 드라마와 전통음악에 대한 관심을 계기로 모이게 된 이들은 2022년 10월 커뮤니티 회원들이 직접 기획하고 운영한 한국문화 행사를 성황리에 마치며, 현지에서 뿌듯한 소감을 전해왔다. ‘문화’를 접점으로 일궈낸 아르코르의 자발적인 움직임과 성과는 양국의 시민들 간의 우호적 관계에 힘을 북돋우고 있다.
‘ARTCOR’는 'PROYECTO SOCIO CULTURAL ARTECOREANO'의 약자로, ‘한국문화를 기반으로 한 사회문화 프로젝트’를 의미한다. 한국문화를 사랑하는 쿠바 현지인 커뮤니티 아르코르는 2015년에 창단해 현재 회원 수가 1만 명 이상에 달하는 대규모 한류 커뮤니티로, 수도 아바나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연합으로 활동하고 있다. 한류의 바람을 지구 반대편 미수교국 쿠바에까지 전하고 있는 주인공들이다.
‘아르코르’는 2010년대 초반 쿠바에서 한국 드라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한국문화 연구와 정보 공유를 목적으로 결성되었다. 특히 2022년에는 진흥원의 해외 한류 커뮤니티 활성화 지원사업 ‘한류컴온’을 통해 일부 경비와 한국문화 관련 물품을 지원받아 2022년 10월 8일부터 15일까지 수도 아바나에서 ‘아바나에서의 한국문화주간’(Korean Week in Havana)을 개최했다. 한식 경연대회 및 시식회를 비롯해 K-팝 그림대회 및 댄스 워크숍, 한복 체험, 조선시대 사진전, 학술 발표회 등을 진행하며 한국문화에 대한 쿠바 대중의 이해와 관심을 높였다. 이들의 행사 소식은 현지 주요 매체 ‘Cartelera’, ‘Canal Educativo’ 등에도 소개되며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아르코르’의 마르타 마리아 대표는 “뿌리와 이념이 다른 나라의 문화행사를 기획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놀랄 정도로 쿠바 대중들의 행사 참여도가 높았고 많은 인정을 받았다”고 전했다. “이번 행사를 계기로 한국이 우리와 조금 더 가까워진 것 같아 기쁘고, 쿠바에 한국문화를 알리고자 했던 커뮤니티의 지난 몇 년간의 노력을 인정받는 것 같아 감사하다”고 ‘한류컴온’ 사업의 참여 소감을 밝혔다.
정길화 진흥원 원장은 “공공의 손길이 닿기 어려운 쿠바를 비롯해 전 세계 각지에서 자발적인 한류의 바람이 불고 있다”며 "앞으로도 진흥원은 더욱 다양한 해외 한류 커뮤니티가 활동의 희망을 싹틔우고 꽃을 피우는 양질의 토양을 마련해 주고자 한다"고 밝혔다.
우리 문화를 사랑하는 커뮤니티의 작은 활동들이 모여 한류 확산 그리고, 국가간의 관계 개선에까지 영향을 줄 것이다. 쿠바 ‘아르코비’의 사례처럼 해외 한류 커뮤니티 활성화 사업에 2012년부터 지금까지 참여한 한류 커뮤니티가 전세계 32개국 232개에 달한다. 우리 문화를 사랑하는 이 커뮤니티들의 작은 활동들이 모여 한류의 확산, 더 나아가 국가간의 관계 개선에도 좋은 영향을 줄 것이다.
진흥원은 해외한류 커뮤니티 지원 사업 외에도 주한 외국인 유학생을 대상으로 한국문화를 배우고 익힐 수 있도록 2015년부터 체험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 ‘아우르기’ 사업을 운영해 왔다. 또한 해외의 신진 아이돌을 한국으로 초대해 K-팝 연수 기회를 제공하는 ‘동반성장 디딤돌’ 사업을 수행하고 있다. 이들 사업들은 한국에 대한 이미지 제고 효과는 물론이고 양국간 저변확대와 교류 활성화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그런데도 이런 사업들이 예산이 삭감되거나 아예 취소될 위기를 맞고 있음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한국이 쿠바와 수교함으로써 비자발급 등이 쉬워지면서 유학과 취업이 늘어나고 교류와 왕래가 더욱 확대될 것이다. 상호 문화 교류는 더욱 활발해질 것이다. 미수교 상태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었던 쿠바내 한인들은 수교를 계기로 그 어느 때보다 모국의 문화를 익혀 정체성을 강화하고 싶을 것이다.
정치, 경제적인 교류도 좋지만 문화적인 교류는 더욱 중요하다. 문화적인 교류는 정치, 경제적 교류를 더욱 굳건하게 만들어준다. 따라서 국가간 문화교류의 판을 깔아주면서 K팝 문화의 해외 저변을 확대하는 진흥원의 업무와 사업은 시기적으로도 더 확대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