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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2025 한국-이탈리아 상호문화교류의 해
‘아레나 디 베로나’ 협력 오페라 마스터클래스
이탈리아 문화의 정수와 교감하다
글 허서현 기자 (월간 객석)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이 ‘한국-이탈리아 수교 140주년 및 상호문화교류의 해(이하 ’한-이탈리아 상호문화교류의 해‘)’의 일환으로, 이탈리아 베로나에 위치한 오페라 극장 ‘아레나 디 베로나’의 예술감독 체칠리아 가스디아(Cecilia Gasdia)의 마스터클래스를 강동아트센터 소극장(‘24.10.10.~11.)에서 개최했다. 최근 전 세계에서 K-클래식 연주자들의 활약이 두드러지고, 이들에 대한 유럽 시장의 관심도 증가하고 있다. 이에 최대 규모의 오페라 축제 극장장과 한국의 젊은 성악가들의 만남은 그 문화교류가 가진 의미의 농도가 짙다. 무엇보다 그 형태가 ‘마스터클래스’라는 깊은 음악적 교감이라는 점에서 더욱 특별했다.
적절한 교류의 장, 오페라
2024년, 한국과 이탈리아의 수교 140주년 기념을 계기로 우리나라 문화체육관광부와 이탈리아 외교협력부는 2024~2025년을 한국-이탈리아 상호문화교류의 해로 MOU를 체결했다. 이로써 양국은 ‘상호문화교류의 해’ 기간 동안 양국 간 문화예술 교류를 발전시키며 새로운 문화적 가치를 창출하기 위해 공연 예술 및 시각 예술 분야에서 인적, 문화적 상호교류의 기반 구축에 힘을 모으기로 했다.
그중에서도, 단연 올해 공연 예술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이탈리아의 오페라 축제, ‘아레나 디 베로나 축제’(이하 ‘베로나 축제’)의 내한이었다. 우선, 이탈리아의 여러 문화 요소 중 오페라가 교류의 대상이 된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이탈리아의 오페라는 2023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될 만큼 높은 가치를 인정받았다. 현재는 독일과 프랑스, 미국에서도 오페라 극장의 위상이 높지만, 이탈리아가 오페라의 본고장임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이는 오페라를 꿈꾸는 성악가들에게도 중요한 의미다. 그들에게 이탈리아의 ‘벨 칸토’ 창법은 음악적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이 창법은 이탈리아의 오페라 작곡가 로시니, 푸치니, 벨리니의 작품에서 정점을 찍었다. 벨 칸토 창법에 대한 깊은 이해는 성악가의 수준을 결정짓는다. 때문에 오페라 현장의 정점에 있는 예술인으로부터 이탈리아 언어의 뉘앙스와 문화적 배경을 듣는 것은 국내 성악가들에게 직접적인 성장을 제공하는 결과를 낳는다.
최근 무서운 성장세를 보이는 K-클래식의 재능 있는 젊은 성악가들의 존재도 이 마스터클래스에 힘을 싣는다. 음반사 DG 아티스트인 소프라노 박혜상, 미국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주역 테너 백석종, 그리고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우승 김태한까지 국제무대를 종횡무진하는 성악가들이 늘어나고 있다. 한국 성악가 중 베로나 축제에 주역으로 데뷔한 바 있는 소프라노 임세경, 여지원 등의 사례를 생각해 보면, 이번 마스터클래스는 예술감독이자 극장장인 체칠리아 가스디아에게 열 명의 한국 젊은 성악가가 눈도장을 찍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세계 오페라의 중심지를 만나는 의미
베로나 축제의 특별함은 그 장소성에 있다. 2,000년 이상의 세월을 간직한 문화유산인 ‘아레나’는, 고대 로마 원형 경기장이자 오늘날의 오페라 축제의 공연장이다. 1850년대, 문화유산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이 공간이 가진 신비한 음향 구조가 발견됐다. 그 어떤 음향 증폭 장치를 사용하지 않아도, 3만 석에 달하는 극장의 끝까지 소리가 전달되는 완벽한 구조를 가진 것.
이 ‘마법 같은’ 공간을 발견한 후, 1913년부터 베로나 축제가 시작됐다. 100년이 넘은 역사를 이어온 오페라 축제 중, 작곡가 바그너의 고향인 독일에서 열리는 ‘바이로이트 축제’와 더불어 ‘베로나 축제’ 데뷔는, 성악가에게 세계 최고의 오페라 인들에게 인정받았다는 인증서와 다름없다.
거장을 만나는 시간, 마스터클래스 현장
오페라 마스터클래스 시작에 앞서, 서울대학교 성악과 교수이자 오페라연구소 소장인 서혜연 교수가 체칠리아 가스디아 예술감독을 소개했다. 마스터클래스가 진행된 강동아트센터 소극장에는 마스터클래스 참가자 뿐만 아니라 오페라에 관심이 있는 지긋한 신사부터 성악을 전공하는 학생들까지 노래에 특별한 열정을 가진 다수의 관객이 자리했다.
“무엇보다 이 마스터클래스가 특별한 이유는,
체칠리아 가스디아가 성악가이자 행정가로서의
넓은 시야를 가졌다는 점이죠.” (서혜연 교수)
‘마스터클래스’는 일반적으로 음악계에서 ‘공개 수업’을 의미한다. 대개 음악계의 거장들이 레슨하는 현장을 일반 청중에게 공개해, 그 수업을 듣는 것만으로도 큰 음악적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체칠리아 가스디아 예술감독은 성악가로서 이력이 출중하다는 점에서 이에 충족한다. 베로나 음악원을 피아노 전공으로 졸업하고, 1980년 마리아 칼라스 콩쿠르에서 1위를 차지한 후 이듬해 오페라에 데뷔한다. 이탈리아의 대표적 오페라 극장인 라 스칼라 극장에서 ‘안나 볼레라’로 데뷔한 이래 1980년대에만 로시니의 오페라 작품에서 14개의 주역을 맡을 만큼 오페라에 정통한 소프라노다. 성악가로서의 탄탄한 음악적 전문 지식을 갖춘 그녀가, 대규모 오페라 축제의 극장장이 된 것은 그만큼의 넓은 역량을 인증한 셈이다.
“2018년부터 아레나 디 베로나의 예술극장 겸 극장장으로서, 언제나 새로운 소리를 가진 성악가들을 발굴하는 데에 힘쓰고 계시는 분입니다. 재능을 가진 젊은 성악가들을 돕기 위한 열정이 넘치시는 분이죠. 오페라계의 발전을 위해 크게 기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각적 시야에서 성악가들을 바라보시기 때문에, 오늘은 또 어떤 조언을 해주실지 무척 기대되네요.”(서혜연 교수)
현장에서 기른 포용적 음악관을 엿보다
체칠리아 가스디아 예술감독의 마스터클래스는 말 그대로 ‘풍성’했다. 이탈리아인 특유의 풍부한 표현과 제스처 덕분에, 통역으로 진행되고 있음에도 그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모두 와 닿았다. 무엇보다 그가 설명하고 있는 것이 음악이었기 때문에, 체칠리아 가스디아 예술감독의 조언에 따라 시시각각 성장하는 젊은 성악가들의 노래를 듣노라면 음악적 지식이 절로 풍부해졌다.
이날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 속 여주인공 비올레타의 아리아를 들고 참가한 이고은은 “악보에 있는 것을 함께 찾으며 시도할 수 있었던 게 가장 좋았다”고 소회를 밝혔다.
“템포나 뉘앙스를 통해서 여러 방식을 제시해 주고, 또 그중에서도 더 어려운 방법에도 도전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시더라고요. 캐릭터를 표현하기 위해 시도는 했지만, 망설이던 부분들이 있었는데 그런 부분들에 확실한 색깔을 입혀주시는 기분이었어요.” (이고은, 소프라노)
마스터클래스는 참가자마다 30분씩 진행됐다. 참가자들이 준비해 온 오페라의 아리아를 처음부터 끝까지 부른 후, 체칠리아 가스디아 예술감독의 조언이 이어지는 방식이었다. 그는 직접 피아노 앞에 앉아 참가자들의 노래를 끌어내기도 하고, 몸을 바짝 붙여 움직이기도 하는 등 매우 열정적인 스승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우리 악보를 같이 볼까요. 로시니가 무엇이라고 적어놓았는지 한 번 봅시다. 미안하지만, 이건 제 의견이 아니에요.(웃음) 원작자인 로시니가 그렇게 부르라고 적어놓았죠. 자세히 보세요. 피아노(여리게)로 부른 다음, 포르테(세게)라고 악보에 적혀있네요. 이 부분을 잘 지켜서 노래하는 것은 무척 중요합니다.” 동시에 눈에 띈 점은, 그가 성악가들의 다양한 해석 버전에 대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최고의 오페라 극장장으로서 수많은 성악가의 무대를 누구보다 가까이 실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제시하는 마스터클래스는 하나의 방식을 강요하지 않고, 여러 해석이 있음을 설명하면서 각 참가자가 자신에게 걸맞은 방법으로 접근할 수 있는 열린 가르침이었다.
“이 부분에 대한 성악가들의 해석은 크게 두 가지로 갈려요.
앞 선율을 빠르게 했다면, 이 부분은 느리게.
혹은 앞이 느렸다면 뒤 선율은 느리게요.
어떤 쪽을 선택하듯 좋아요. 저는 앞의 방식을 조금 더 선호합니다.
두 방식 모두로 불러봅시다. 어떤 게 편한 것 같아요?” (체칠리아 가스디아)
차세대 성악가들의 음악적 깊이
참가자들이 느낀 유익함도 특별했다. 로시니의 아리아로 마스터클래스에 참가한 소프라노 남수지는 “캐릭터에 대한 해석의 새로운 관점을 느꼈다”라며, “내 나름대로 이 아리아에서 감정의 주요 변화라고 느낀 지점이 있었는데, 마스터클래스를 통해 선생님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신 지점이 달랐다. 그 해석을 통해 그전에는 미처 알지 못한 부분들이 새롭게 다가왔다”고 소감을 남겼다.
30분이란 시간은 음악에 대한 모든 것을 배우기에는 짧은 시간이었다. 매 참가자들의 순서가 끝날 때마다 체칠리아 가스디아 예술감독은 아쉬운 표정으로 따뜻한 포옹과 볼 키스를 나눴다. 마스터클래스는 응시 자격 중 하나로 졸업 작품 외 오페라 전막 공연에 1회 이상 출연 경험을 제시했다. 오페라 현장에 바로 투입될 준비가 되어 있는 차세대 성악가들에게 집중하겠다는 의지로 보였다. 때문에 대부분의 참가자가 이탈리아어 가사에는 능숙한 편이었다. 저마다의 오페라 캐릭터에 대한 해석도 뚜렷했다. 그러나 이탈리아 언어와 문화권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체칠리아 가스디아 예술감독이 강조한 딕션(발음법)은 대부분의 참가자들에게 강조됐다.
“제가 거듭 강조하지만, 이 가사에서 원래의 ‘이탈리아어 악센트’가 어디에 붙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는 노래의 강세를 어디에 두어야 할지에도 영향을 미쳐요. 이 로시니 특유의 스케일도 자세히 살펴보아야 해요. 물론, 이렇게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이 어렵다는 걸 저도 너무나 잘 알아요. 실제로 현장에서도 많은 성악가가 어려워하는 부분이랍니다.” (체칠리아 가스디아)
또 다른 참가자 바리톤 이천초는 “10년간 이탈리아 유학 생활을 경험했음에도, 베로나 축제의 예술감독을 만날 기회는 쉽지 않다. 현지에서도 얻기 어려운 기회의 창구가 한국에서 열려, 성악가들에게는 정말 뜻깊다”고 강조했다. 또한 이번 마스터클래스를 통해서는 “발성에 국한되지 않고, 새로운 시도를 해봐도 좋겠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추상적으로 설명하지 않아서 더 잘 이해하고 정확하게 선생님의 해석을 따라갈 수 있었다. 나 스스로 쳐놓은 울타리 바깥으로 넘어가 음악적으로 확장해 봐야겠다고 생각하게 됐다”고 밝혔다.
공통 언어인 음악을 통한 교류
약 3시간에 걸쳐 진행된 마스터클래스를 마치고, 체칠리아 가스디아 예술감독은 객석에 앉아 있는 이들을 향해서도 시간을 할애했다. 성악 전공을 하는 사람은 얼마나 참여했는지 손을 들어보라며 관심을 표하기도 했다. 마스터클래스 중, 체칠리아 가스디아 예술감독이 언급한 내용에 대한 질문이 이어졌고 긴 마스터클래스 이후임에도 성실한 답변이 이어졌다.
모든 순서가 끝나고, 참가자들에게 아레나 디 베로나 마스터클래스 수료증을 증정하는 수료식이 진행됐다. ‘아레나 디 베로나’의 이름으로 수여된 이 경험이 젊은 성악가들의 앞날에 필요한 자양분이 될 것이 분명해 보였다. 무엇보다 클래식 음악이라는 공통의 언어를 통해 서로를 깊이 이해하고 관찰한 이 순간이, 한국과 이탈리아 양국 모두가 같은 마음으로 공존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문화를 통한 교류의 순기능을 목도하며, 앞으로도 더 많은 국가, 장르와의 교류로 한국의 음악가들에게 풍성한 기회의 장이 펼쳐지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