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월간 한류동향 심층분석보고서 <한류NOW>
한류몽타주
한국 문화산업 생산지형의 현재와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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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한류와 창의적 생산자의 탄생

현재 한류의 한복판에 서 있는 창작자들이 갈구하는 가치는 자유, 특히 ‘긍정적인 자유’다. 구체적으로 1) 새로운 환경으로 이행할 자유(디지털 엑소더스), 2) 자신의 흥미와 가치, 그리고 능력을 실현할 수 있는 자유(자신의 변화), 3) 풍족한 물적 자원이 제공되고 기존의 틀을 넘어서는 경험, 접촉, 수용, 평가, 인정이 가능한 자유(글로벌)이다. 이러한 긍정적 자유는 새로운 가능성을 요청한다. 요약하면, 1) 제작의 가능성: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만드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물적 자원, 2) 사회적 접촉의 가능성: 그들의 작품이 다양한 글로벌 수용자들과 직접 만나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기술적 지원 3) 문화적 표현의 가능성: 각자 원하는 소재를 원하는 스타일로 표현할 수 있는 미학적·문화적 개방성과 다양성이다.
김예란 광운대학교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1. 한류란 사선의 관통력1)
탄생은 갑자기, 진공 속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한류’가 상징하듯이 만약 한국의 문화활동이 이전과 다른 국제적 의미와 영향력을 가지게 됐다면, 그리고 이를 생산하는 이들의 노동이 이전과 다른 세계적 평가와 가치를 확보하게 됐다면, 이는 새로운 누구 혹은 예전에 없던 무언가가 불현듯 ‘탄생’해서 그런 건 아니다. 이 변화가 지금, 여기에서 가시적으로 돌출될 수 있도록 한 조건과 맥락, 그리고 주체들의 누적된 활동이 반드시 선행한다.
한류는 아메리카 대륙 발견 이후 수백 년 동안 진전된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역사 안에서 이미 진행되어 온 글로벌 혼종화 환경에 한국이 비로소 들어선 사건에 가깝다.2) 이미 구축돼 있던 글로벌 혼종화 환경에 한국이 다소 뒤늦게, 전면적으로 등장할 수 있었던 건—식민이나 전쟁을 거치며 사람들의 교류와 이동을 따라 이뤄진 이전의 타문화 혼종화 사례와 달리—디지털 기술에 의해 매개되는 대중문화의 영향력이 주효했다.
따라서 한류는 이전의 서구-비서구, 중심-주변으로 이분화돼 왔던 권력 구조를 일종의 사선으로 관통하는 새로운 운동선이다. 한류는 서구문화에 대한 도전이나 종속도 아니고 이를 압도하는 전적인 승리도 아니며, 기존의 조건적 맥락과 절충적인 사선의 관통력이다. 사선의 관통력이라는 역동을 조망할 수 있는 시각은 다양하겠지만 나는 문화생산자의 관점에서 이 현상을 살펴보겠다. 스타 몇 명이 갑자기 만들어낸 듯한 한류의 ‘탄생’이 아닌, 오랫동안 누적된 조건적 활동의 변화 가능성으로서 문화생산이 유의미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이 글은 필자가 이전에 발표한 다음 두 편의 작업을 바탕으로 작성됐음을 알린다.
김예란 (2022). 죽음, 우정, 그리고 <오징어 게임>: 글로벌 시각정경과 의미 세계. 《방송문화연구》, 34(1). 7-47.
Kim, Yeran (2023). Hallyu: Potentiality, Creativity and Freedom. UK-South Korea Hallyu Network. Seoul National University.
2)유럽 사회에 ‘이미’ 자리 잡은 남아메리카 문화, 영국에 ‘이미’ 일상화된 인도권 문화, 프랑스 사회에 ‘이미’ 안착해 있는 북아프리카 문화가 그 사례다.
2. 글로벌 플랫폼에서의 초국적 문화생산
글로벌 플랫폼 환경은 문화의 창작 또는 창작의 문화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플랫폼 환경에서의 문화 창작은 이전의 문화 창작과 유사할까? 미디어 학자인 포엘, 니보르그, 더피의 공동 저작인 <플랫폼과 문화생산>(2022)에 따르면 플랫폼에서의 문화생산은 그 이전과 비교할 때 시장, 인프라스트럭처, 거버넌스, 노동, 창의성, 민주주의를 포함하는 전 영역에서 차별성을 지닌다. 특히 나의 관심사인 창작자 영역과 관련해서 저자들이 제시하는 창의성(creativity) 논의가 흥미롭다. 저자들은 플랫폼 환경에서 문화 창작의 창의성을 구성하는 네 요소를 ‘틈새화, 계량화, 브랜딩, 진정성(nichification, metrification, branding, authenticity)’으로 규정한다.
위의 창의성을 구성하는 네 가지 요소를 한류에 적용해보자. 우선 ‘틈새화’와 관련해서, 한류는 서구 중심적인 글로벌 문화 지형 속에서, 비서구-아시아-급속 발전한 한국이라는 틈새 매력에 힘입어 성공한 바 크다. 두 번째 요소인 ‘계량화’는 한류 담론에서 과잉될 정도로 도드라지는 요소다. ‘억대’로 말해지는 아이돌의 유튜브 조회수, ‘몇 개국’에서 ‘1위’를 달리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에 대한 찬미는 물론이고, 해당 엔터테인먼트 기업과 스타의 수익과 브랜드 가치 등이 숫자로 평가된다. 아울러 플랫폼의 추천 알고리즘은 이 같은 거대 문화산업 시스템이 더욱 효과적으로 작동하도록 이끄는 첨단 계량화 장치다. 이어 ‘브랜딩’이라면, 당연히 익히 알려진 ‘K-’다. K-컬처, K-POP, K-드라마, K-콘텐츠… 등으로 계속 이어지는 의미 불분명의 이 알파벳 K는 그 안에 국가주의, 민족주의,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의 이념을 함축하며 한국의 문화 활동 전체를 아우르는 깃발처럼 나부낀다.
  • 플랫폼의 추천 알고리즘은 거대 문화산업 시스템이 더욱 효과적으로 작동하도록 이끄는 첨단 계량화 장치다. (출처: 셔터스톡)

그렇다면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마지막 요소, ‘진정성’은 어떠한가? 문화 영역에서 진정성은 창작자의 자발성, 자유, 창의성이 얼마나 투명하게 생성, 표현, 공유, 인정되는지, 이 과정에 저자의 순수성을 왜곡하는 경제, 정치, 사회적 요소들의 개입과 영향력은 없는지에 관한 사항이다. 나는 한류에 있어서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가장 문제적인 영역이 진정성이라고 생각된다. 이제 내가 행한 창작자 인터뷰를 바탕으로 한류를 비로소 실재하도록 만드는, 실제 인간 활동의 주체로서 문화 창작자의 진정성을 살펴보겠다.
3. 한국 창작자들의 진정성
나는 한국 엔터테인먼트 영역에서 활동하는 창작자들을 대상으로 인터뷰를 실행한 바 있다. 한류의 기류 안에서 창작자가 지니는 기대와 경험, 희망과 절망의 의미들은 창작자의 진정성과 직결된다.
1980-90년대 한국 대중문화의 중심이 TV방송과 영화에 있을 때, 우수한 문화인력들이 영상산업 영역에 집중적으로 몰렸다. 사실 오늘날 한류의 성공은 당시 영화감독, 방송PD, 연예인 활동에 진입한 이들이 이삼십 년 동안 퍼부은 노력이 뿜어내는 활력이고 결실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방송 영화 영역으로 집중했던 이 흐름은 최근 디지털 미디어 영역이 급성장하면서 디지털 문화산업 영역으로 이행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 이행은 정준희(2014)가 디지털 ‘엑소더스(대이동)’라고 부른 현상이다.
이를테면 지상파방송 PD가 프리랜서 활동을 선언하며 몸담고 있던 방송사를 사직하고 플랫폼 기업의 제작비로 대형 작품을 만드는 사례는 더 이상 새롭지 않을 정도다. 또한 방송사 창작인 중 적잖은 수의 인력들이 대형 독립 프로덕션이나 엔터테인먼트 기업으로 이직하는 일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이미 잘 알려졌듯이 MBC의 <무한도전>으로 유명한 김태호 PD는 “자신을 변화시키고자” 새로운 영역으로 나아간다고 밝힌 바 있다. 또 필자와의 개인 인터뷰에서 <오징어 게임>의 황동혁 감독은 “애초에 <오징어 게임>은 글로벌 시청자를 목표로 만들어졌다”고 밝힌 바 있다. 그가 말하는 ‘글로벌 시청자’란 한국의 제도적, 도덕적, 문화적 규범과 규칙 체계로부터 자유로운, 열린 시선의 다양한 수용자들을 가리킨다. 기존의 규범과 규칙, 질서로부터 자유롭게 자신의 작품이 수용, 평가, 인정될 가능성을 기대했다는 뜻이다. 그 외에도 내가 만난 익명의 창작자들은, 자신은 단지 창작자이기에 금전적인 수익은 크게 중시하지 않으며, 중요한 것은 자신이 원하는 작품을 만들 수 있는 물적 조건과 그에 부여되는 다양하고 열린 수용 시선이라고 강조했다.
  • <오징어 게임>의 황동혁 감독은 “애초에 <오징어 게임>은 글로벌 시청자를 목표로 만들어졌다”고 밝힌 바 있다. (출처: 셔터스톡)

창작자들의 발언에 반복되어 사용된 ‘디지털 엑소더스’, ‘자신의 변화’, ‘글로벌’ 등의 단어는 이전에는 불가능했던 무엇인가에 다가갈 수 있도록 하는 ‘가능성’ 그 자체를 표상한다. 그리고 이들은 이 가능성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는 환경을 지향하고 있다. 글로벌 플랫폼은 이 가능성과 자유, 열망이 가능한 환경으로 기대되고 있다.
현재 한류의 한복판에 서 있는 창작자들이 갈구하는 가치는 자유, 특히 ‘긍정적인 자유’다. 무엇을 하지 않을 자유를 뜻하는 ‘부정적인 자유’와 달리 ‘긍정적인 자유’는 무엇을 할 수 있는 자유를 말한다. 창작자의 긍정적인 자유란 구체적으로 1) 새로운 환경으로 이행할 자유(디지털 엑소더스), 2) 자신의 흥미와 가치와 능력을 실현할 수 있는 자유(자신의 변화), 3) 풍족한 물적 자원이 제공되고 기존의 틀을 넘어서는 경험, 접촉, 수용, 평가, 인정이 가능한 자유(글로벌)이다.
이러한 긍정적 자유는 새로운 가능성을 요청한다. 기존 한국 문화 지형과 국경 안에서 레거시 미디어의 한계를 넘어서는 ‘가능성’이다. 요약하면, 1) 제작의 가능성: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만드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재정적·물리적 자원 2) 사회적 접촉의 가능성: 그들의 작품이 광범위하고 다양한 글로벌 수용자들과 직접 만나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기술적 지원 (대표적으로 플랫폼) 3) 문화적 표현의 가능성: 그들이 관심 있는 소재를 원하는 스타일로 표현할 수 있는 미학적·문화적 개방성과 다양성이다.
4. 무조건의 해피엔딩은 없다
한류의 흐름에서 긍정적 자유를 실천하는 문화창작자들의 활력을 보면서, 그럼에도 우리는 건강한 지속가능성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국내 창작자들 대부분을 옥죄고 있는 문화노동 영역에서의 불합리·불평등·열악성의 문제 등 문화생산 현실의 뿌리 깊은 모순이 여전히 심각하다. 또한 한국 창작자들의 자유와 창의성의 산물이 소수의 글로벌 거대 플랫폼에 의해 흡수되는 구조에 대해서도 성찰이 필요하다. 여기에 추천 알고리즘의 정당성 여부, 감시자본주의의 통제권력, 개별국가와의 이해관계 충돌, 다양한 지역 플랫폼들의 위기, 열정 노동자의 위태성 등의 문제 역시 연관된다.
마지막으로 현재 문화창작자들이 스스로 밝힌 한류 담론에서 자유와 가능성이 강조되는 현상은 기존의 자국 문화 현장에서 창작의 자유와 가능성이 매우 제한되고 빈곤했음을 알리는 중요한 신호이기도 하다. 이는 한국 사회가 한류의 성공에 기뻐하는 것만큼이나 기성의 폐쇄적이며 빈곤한 국내 문화환경을 진지하게 반성하고 개선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문제들은 디지털 네트워크가 대중화되고 일반 대중들이 크고 작은 문화생산자로 활동하며 삶의 모든 영역이 플랫폼 자본주의화 되는 현재 상황에서, 과연 인간에게 어떤 자유와 창의성이 가능한가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이기도 하다.
참고문헌
정준희 (2014). 신규 복합 미디어 기업의 부상과 제작자 엑서더스: 종합편성채널 승인 이후 방송 제작 부문의 창의성 재배치 동학. 《한국언론정보학보》, 66(2). 28-58.
Poell, Thomas., Nieborg, David., & Duffy, Brooke Erin (2022) Platforms and Cultural Production. Polity.
Srnicek, Nick (2016). Platform capitalism. Pol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