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cus 1
음악 케이팝 음악기획자의 노동 정체성과 가치
문화산업에 대한 정책과 학계의 관심은 창의성, 창의노동자에만 집중돼 있으며, 산업을 움직이는 중요한 인력인 기획자의 숨겨진 노동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기획자의 노동은 창의노동만으로 이뤄져 있지 않고, 시스템을 움직이는 과정에서 다양한 형태의 관계노동과 감정노동이 발생한다. 그러나 관계노동과 감정노동은 보상되지도 않고, 기획자의 노동 정체성 요소로 인정받지도 못하고 있다. 따라서 기획자의 가치와 노동에 대한 제고가 필요하다.
이상화 에스엠엔터테인먼트 이사·공연/영상 제작센터 센터장
1. 기획자의 노동
창의성을 특별하고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특질로 보는 시각으로 인해 창의성은 측정이 어려운 것이 본질인 것처럼 여겨진다(Saintilan & Schreiber, 2018). 측정이 어려워 평가와 보상체계도 모호하지만, 그럼에도 창의성은 문화산업 노동자의 가장 중요한 역량이자 가치이며, 내재적 동기를 유발하는 것으로 설명된다. 창의성은 국가적 성공스토리와 기업의 성공전략으로 포장되고, 노동자들의 정체성은 산업이 원하는 모양대로 가공된다.
이처럼 산업은 창의성 개념을 유용하게 활용하나, 창의 전문가가 되는 것은 온전히 개인의 몫이다. 나아가 창의성은 소모되는 자원이 아니기에 착취적이게 되고(Bilton, 2007), 불규칙하고 과도한 근무시간을 유발한다. 창의성과 창의노동자를 둘러싼 다양한 논의가 있지만, 문화산업의 연구와 정책은 창작자에게 집중돼 있다. 음악산업의 경우도 아티스트와 프로듀서, 작곡가 등 창작에 직접적으로 기여하는 이들에 대한 관심만 높을 뿐 A&R, 프로젝트 매니저, 마케터 등 사업 방향과 전략을 정하고 프로젝트를 관리하는 ‘기획자’ 군의 노동에 대한 관심은 높지 않다. 이처럼 창작자에게만 관심이 집중되는 현상은 바람직하지 않다. 문화산업의 창작물은 예술 작품보다 복잡다단한 구조 안에서 수많은 인적 네트워크와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기획, 생산, 배급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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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팝 공연 관련 이미지들 (출처: 셔터스톡)
2. 기획자의 관계노동 - 창의적 관계노동
문화산업은 왜 기획자라는 직군과 직무를 만들었을까? 문화산업은 불확실성을 줄이기 위해 아이디어 하나에만 의존하거나 완전하게 낯선 창작물을 만드는 것을 선호하지 않는다. 문화산업에서는 다양한 창작자의 아이디어, 혹은 통용되는 시장의 기존 아이디어를 조합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상품이 판매되기 위해서는 다양한 미디어와 채널을 통해 고객과 만나야 하고, 여러 층위의 이해관계자를 만나 설득하고 가치를 알려야 한다. 이러한 프로세스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다양한 지식과 정보를 가지고 폭넓은 분야를 넘나드는 네트워크를 가진 인력이 필요하다. 인적 네트워크를 관리하는 노동자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관계노동(relationship work)’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기도 했다(Colvin, 2015).
음악 역시 A&R, 프로젝트 매니저, 마케터, 유통 담당자의 손을 거쳐 사업화된다. Negus(2002)는 생산과 소비의 거리가 넓혀지고 과장되면서, 과정이 중요시되지 않는 것을 지적한 바 있다. 생산과 소비의 과정에는 사실 수많은 기획자와 그들이 행하는 커뮤니케이션 및 의사결정이 개입돼 있지만, 그 과정은 신비화되고 결과의 화려함만 강조되면서 소비자는 그 노동을 볼 수 없어 기획자들을 소외시킨다. 개인 차원에서의 창의성 강조는 조직 및 집단 차원에서 일어나는 창의와 관계노동을 무시하게 만든다. 기획자의 노동은 관계의 연결을 통해 창의를 창출하기에 ‘창의적 관계노동’이라 볼 수도 있는데(이상화, 2021), 기획자의 ‘창의적 관계 노동’은 산업과 학계에서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는다. 하지만 창의적 관계노동은 기획자의 노동자 정체성에서 중요한 부분을 형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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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기획자의 노동은 관계의 연결을 통해 창의를 창출하기에 ‘창의적 관계노동’이라 볼 수 있다. (출처: 셔터스톡)
3. 기획자와 감정노동 - 자율성과 보상
기획자들은 감정노동자인 아티스트를 대하는 상황과 업무 및 결과물에 대한 자율성과 의사 결정권을 갖지 못하는 상황에서 감정노동을 겪는다. 음악산업의 창작물은 조직의 협업에 의해 만들어지지만, 의사 결정권과 보상은 아티스트 혹은 소수 상위 계층(프로듀서, 기획사 대표)에 극도로 집중돼 있다(이상화, 2021). 상위 계층의 사람들은 자신의 개인적 성향에 맞춰 고안된 비공식적 법칙을 결정할 특권을 누리는데, 감정적 보상을 포함한 보상에 대한 발언권 또한 강하다(Hochschild, 2003). 창의 업무에 대한 결정권을 가진다는 것은 감정노동을 상쇄할 만한 동기부여와 보상이지만, 결정권이 소수에 집중돼 있어 기획자에게는 2차적 감정노동을 유발한다.
문화산업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다”, “창의적인 일을 하고 있다”는 내재적 동기를 심리적 보상으로 내세우고 있기에, 감정노동을 공식적으로 인정함으로써 기획자의 심리적 보상체계에 영향을 주는 것을 두려워한다. 기획자의 감정노동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늘에 가려지면서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지속된다.
4. 케이팝 음악기획자의 가치
관계노동, 감정노동의 소외, 보상체계의 문제가 존재하는 가운데 기획자에 대한 케이팝 시스템의 의존도는 커지고 있다. 케이팝 생산시스템은 전통적인 음악산업보다는 글로벌에서 제조, 판매되는 공산품의 시스템과 유사하다. 곡은 북미와 유럽의 작곡가로부터 수급되며, 안무는 미국과 일본의 유명한 안무가의 시안을 받아 조합한다. 케이팝은 단순히 가장 좋은 것을 사용하는 방식만을 취하지 않는다. 프로젝트 매니저나 A&R은 해외의 작곡가 및 안무가에게 제작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기도 하며, 수급된 창작물을 받아 조합, 수정해 최적의 상태를 만든다. 창의나 창작물을 고귀한 것으로 보아 함부로 수정을 가하지 않는 태도는 케이팝에서 보기 어려우며, 더 좋은 퀄리티를 위해 수정하고 변형하는 것이 당연시된다. 빌보드매거진의 기고자였던 타마르 헤르만(Tamar Herman)은 케이팝의 제조과정을 공장 시스템(factory system)에 비유하기도 했다. 각 생산단계의 연결과 작동이 기획자에 많은 부분 의존하고 있음에도 기획자의 노동이 소외되고 있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생산시스템뿐만 아니라, 사업 및 마케팅 전략 측면에서도 기획자의 노동은 중요하다. 스토리텔링을 통해 공감과 경험을 극대화하고, 음악을 포함한 공연, 머천다이즈, 웹툰, 웹소설 등 다양한 콘텐츠를 다양한 사업 영역으로 연계하는 케이팝 생태계에는 기획자의 창의적 관계노동이 필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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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을 포함한 공연, 머천다이즈, 웹툰, 웹소설 등 다양한 콘텐츠를 다양한 사업영역으로 연계하는 케이팝 생태계에는 기획자의 창의적 관계노동이 필수적이다.(출처: 셔터스톡)
최근에는 뮤직 플랫포마이제이션(Platformization)1)에 따른 제작과정의 변화도 기획자 노동 가치의 무게를 더하고 있다. 창작자의 감에 의존한 음악 제작 비중이 작아지고, 뮤직 플랫폼이 제공하는 데이터 분석이 기획의 선단에 위치하고 있다. 케이팝 특유의 시스템과 전략적인 선택, 환경의 변화로 인해 기획자의 역할과 필요성은 확대되고 있다. 기획자들은 촘촘한 케이팝 시스템 안에서 다양한 이해관계자들과 창의적 관계노동을 하며 스토리텔링이 콘텐츠 및 사업과 연계될 수 있도록 매개한다.
1)플랫폼의 인프라 및 정책, 경제적 확장이 디지털 생태계에 침투해 문화산업의 근본적인 구조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의미한다(Nieborg & Poell, 2018).
5. 케이팝 기획자의 노동자 정체성
케이팝 시스템은 창의노동뿐만이 아닌, 다양한 관계를 매개하는 관계노동, 아티스트와 팬, 다양한 이해관계자와 공감하는 감정노동을 자원으로 작동한다. 이러한 환경으로 인해 기획자의 노동자 정체성은 창의, 관계, 감정노동이 중첩되며 형성돼 있는데, 기획자가 산업 내에서 확실한 정체성과 위치를 갖기 위해서는 창의적 관계노동을 인정받는 것과 동시에, 자율성과 통제 능력을 확보해 자아를 유지하고 보상받는 것이 필요하다.
디지털화로 산업이 역동적으로 변하고 경계 또한 모호해지면서 직선형 경력이나 선형적인 이해가 어려워졌고, 다양한 분야를 넘나드는 능력과 연결이 강조되면서 정체성 혼란은 심화되고 있다(제현주, 2020). 케이팝은 이러한 변화의 선두에 서 있기에, 기획자들이 ‘산업 내 기획자의 필요성’을 체감하고 있으면서도 ‘존재 가치’, ‘정체성’에 대해서는 여전히 혼란스러워한다. 제현주(2020)는 문화산업에서 하나의 정체성으로 일컬어지는 ‘창의적 전문가’ 자체가 사실은 판타지이며, 오히려 다양한 정체성이 답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기획자도 다양한 정체성을 지닐 수밖에 없고, 그러한 정체성에 걸맞은 산업과 학계의 고민이 요구된다.
6. 나가며
음악산업 내 고학력자 비중은 높은 편이지만, 종사자의 연령은 타 문화산업에 비해 높지 않다. 기획자들은 고학력자로 진입했지만, 이를 장기적인 경력으로 가져가는 데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음악산업이 지식재산권을 확보하고, 미디어 및 플랫폼과의 결합을 통해 종합 콘텐츠 회사로 성장하며 산업적 모양새를 갖춰가고 있지만, 기획자가 처한 현실은 심리적·경제적 보상의 결핍이다. 가파른 성장은 국가와 산업의 관심을 성과에만 집중하게 했고, 예측이 어렵고 변수가 많은 상황은 투자자 위주로의 보상체계를 성립하게 했다. 문화산업에서 상품 생산과정이 다양한 전문성을 가진 사람들이 기여하는 구조로 변화되고 있음에도 관심과 보상체계는 소수에 집중되는 이전의 관행은 여전하다.
산업은 콘텐츠의 성과에 근거해 성과급을 지급하되, 직접적인 창작자 외에도 다른 참여 인력들에게 분배가 가능한 기준을 수립해야 한다. 역량 개발이나 감정관리 또한 개인에게만 책임 지우지 말고, 전문화된 교육 시스템을 구축하고 심리 상담 등을 제공해야 한다. 정부의 음악산업 지원 정책도 기술과 해외 진출에 집중돼 있으나, 노동자들의 재교육과 커리어 상담 등의 영역에도 정책적 관심과 예산의 분배가 필요하다. 기획자가 자신이 하는 노동에 대한 직업적 자긍심을 유지하는 것은 일에 대한 개인적인 헌신만으로는 유지될 수 없다. 노동자에게 있어 좋은 노동의 완결은 정체성의 확립과 보상이 동시에 수반돼야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