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cus 2
사람을 향한 이야기 <무빙>,
장르를 넘어 플랫폼을 매혹하다
<무빙>은 넷플릭스의 <오징어 게임>과 마찬가지로 OTT 플랫폼 디즈니플러스의 전환점을 가져올 만한 시리즈다. 원작자 강풀이 직접 시나리오 작업을 맡은
<무빙>은 20부작이라는 파격적인 편성을 시도했다. 강풀 작가의 이야기는 언제나 캐릭터들의 사연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관이 짜인다. 그간 강풀 원작의 영화들이 탄탄한
이야기에도 상대적으로 박한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었던 건 방대한 이야기를 온전히 담아내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강풀 원작이 빛을 발할 수 있는 것은 긴
상영시간을 보장하는 시리즈 형태다. 애초에 12부작으로 기획된 시리즈는 이러한 방향성을 가지고 20부작까지 확대됐다. <무빙>은 6~7개의 에피소드씩 묶어 현재, 과거,
다시 현재로 돌아오는 3부작 구성을 취한다. 에피소드마다 캐릭터의 특색에 맞춰 멜로드라마, 하이틴 로맨스, 액션 누아르 등 다양한 장르적 특색을 선보이는 것도 <무빙>의
장점이다. 20부작이라는 긴 호흡에도 불구하고 지루하지 않은 비결이 여기에 있다. <무빙>은 기발한 연출이나 아이디어보다는 기본에 집중하는 성실한 이야기다. 때때로
변하지 않는 진심은 유행을 뛰어넘는다.
송경원 씨네21 기자
<무빙>은 디즈니플러스의 게임체인저가 될 수 있을까. 지금 OTT 플랫폼은 오리지널 시리즈 확보 전쟁에 돌입했다. OTT 플랫폼 간의 경쟁이 치열해짐에 따라 각 플랫폼의
색깔을
드러낼 수 있는 독자적인 콘텐츠 확보가 무엇보다 중요해진 지금, 오리지널 시리즈의 인기는 곧 플랫폼의 경쟁력을 대변한다. 당초 OTT 플랫폼은 방대한 콘텐츠를 확보하고
제공하는 아카이브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거란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실상은 매주 공개되는 신작을 통해 구독자를 유인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에 따라 신규 오리지널 시리즈는
곧 플랫폼의 정체성이자 성공의 척도로 자리매김 중이다. 요컨대 OTT 플랫폼이 과거 할리우드 스튜디오처럼 인식되고 있다는 말이다.
황동혁 감독이 연출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오징어 게임>은 넷플릭스의 전환점이 됐다. 잠시 침체기에 접어들었던 넷플릭스가 국면을 전환할 수 있는 성공 사례를 보여준
<오징어 게임>은 한 편의 메가 히트작을 넘어 넷플릭스의 정책과 기조를 바꿨다고 해도 무방하다. 이후 여타 OTT 플랫폼도 게임체인저가 될 수 있는 메가 히트작 확보가
더욱 절실해진 상황이다. 이런 국면에서 디즈니플러스의 전환점이 될 수 있을 만한 오리지널 시리즈가 나왔으니 다름 아닌 <무빙>이다. <무빙> 역시
<오징어 게임>처럼 한 편의 성공작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성적 부진을 이유로 한국 시장의 축소를 검토하던 디즈니플러스의 방향을 돌려놓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무빙>의 제작 모델은 이전의 시리즈와 확실한 차별점을 제시한다. 플랫폼별 오리지널 시리즈의 형식과 흥행 공식, 선호 장르가 어느 정도 고착화 되는 듯한 상황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 <무빙>, 그 성취를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1. 20부작의 시리즈가 완성되기까지
2015년 연재된 강풀 작가의 웹툰 <무빙>이 20부작 시리즈로 탈바꿈하는 데는 거의 8년이 걸렸다. 긴 시간이 필요했던 건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부분도 있지만,
그보다는 기존에 해왔던 패턴을 완전히 부수고 새로운 영역을 구축하는 도전이 필요했던 상황에 기인한다.
영화 <아파트>(2006), <이웃사람>(2012), <26년>(2012) 포스터 (사진출처: 쇼박스, 롯데엔터테인먼트, 청어람)
강풀 작가는 한국 웹툰 작가 중 영상화된 원작을 가장 많이 보유한 작가 중 한 사람이다. 2006년 영화 <아파트>를 시작으로 <바보>(2008),
<이웃사람>(2012), <26년>(2012) 등 극장 애니메이션까지 합치면 무려 7편의 웹툰이 영상화됐다. 2010년대 콘텐츠 IP의 변방에 있던 웹툰을
영화 원작의 중요한 소스 중 하나로 급부상시킨 흐름의 제일 앞자리에 강풀이 있다. 영화가 최종 콘텐츠로 인식됐던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당연한 말이지만 강풀 작가의 웹툰은 항상
영화를 기본 전제로 시도됐다. 강풀의 웹툰은 장르적 특색이 강하고 짧은 에피소드로 휘발되곤 하는 초창기 웹툰들에 비해 흔히 말하는 극적 완결성이 강한 드라마에 집중된 특징이 있다.
그것이 강풀 원작의 웹툰이 영상화의 소재로 각광을 받은 매력이었지만 동시에 약점이기도 했다.
강풀 웹툰 원작의 영화들은 한 편의 완결된 이야기 안에 방대한 원작의 내용을 어떻게 축약시킬 것인지가 늘 핵심 과제였다. 드라마성이 강하다고 하지만 웹툰은 매체적 특성상 영화보다
더 많은 양의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다. 강풀 웹툰이 드라마가 강하다는 건 달리 말하면 캐릭터들이 지닌 이야기 하나하나를 공들여 묘사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양한 캐릭터가 나와
각자의 사연을 부딪친 끝에 앙상블을 이루는 것이 강풀 웹툰의 기본 골자다. 이는 탄탄한 드라마 구축을 위한 바탕을 제공하지만 동시에 상당량의 에피소드를 잘라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강풀 웹툰 원작 영화들이 종종 상대적으로 박한 평가를 받아온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정된 시간에 축약해야 하는 영화의 특성상 주요 인물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각색할 수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강풀 원작 특유의 끈끈한 드라마들이 상당 부분 휘발돼 본연의 매력이 종종 사라지곤 했다. 강풀 작가 역시 이런 문제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웹툰의 영화화가
잠시 숨을 고르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다.
강풀 작가는 기본적으로 원작자의 위치를 지키며 각색에 크게 참여하지 않는 태도를 취했다. <무빙>의 시리즈화가 거론되던 시기도 마찬가지였다. 시간능력자를 다룬
<타이밍> 이후 강풀 작가는 긴 호흡의 한국형 슈퍼 히어로물의 세계관을 짜는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시간능력자를 주인공으로 한 <타이밍>, 신체능력자들이
등장하는
<무빙>, 세계관을 이어 나가는 <브릿지>, 아직 선보이지 않은 <히든>까지 거대한 유니버스를 구상한 것이다. 이는 종전의 웹툰들과 달리 한두 편의
영화로 처리하기 불가능한 분량이다. 강풀 원작의 웹툰이 한동안 영상화되지 못했던 것은 이런 접근 방식의 변화 때문이다. 변화한 그의 이야기엔 더 많은 분량이 필요했다. 따라서 다시
영상화가 거론된 <무빙>은 자연스럽게 영화가 아닌 여러 에피소드의 시리즈로 걸음을 뗐다. 초반 트리트먼트1)작업 중
원작자로서 피드백을 제시하던 강풀은 이번엔 직접 시리즈 작가로 나서기로 결심한다. “초고에 가까운 러프한 극본을 4회까지 받았다. 만화와 비슷한 구조로 쓱쓱 진행됐는데 내가
생각했던 방향과는 조금 다르더라. 그래서 내가 느낀 아쉬운 지점에 대해 의견을 내다보니 제작사 스튜디오앤뉴에서 그냥 직접 대본을 써보는 게 어떠냐고 권유했다. 호러 만화 연재를 두
달 앞둔 시점이었는데 덜컥 써보겠다고 했다.”(임수연, 2023. 10. 12) 이 선택이 오로지 <무빙> 시리즈라는 새로운 모델을 만든 시작이다.
<무빙>은 시리즈 중에서도 이례적으로 20부작이라는 방대한 분량을 자랑한다. 북미의 TV쇼가 12부작 내외로 시즌제 구성을 취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매우 긴 호흡의 파격적인
구성이라 할 수 있다. 넷플릭스를 비롯한 OTT 오리지널 시리즈는 짧게는 4부작, 길어도 8부작에서 10부작 내외의 짧은 호흡이 대세다. 이런 상황에서 시즌을 나누지 않고
20부작을 한 번에 보여준다는 시도는 선행 모델이 없는 모험적인 시도였다. 굳이 유사한 모델을 찾자면 국내 지상파TV 드라마에 가깝지만 그걸 감안해도 상당히 긴 분량이다.
<무빙>의 최초 버전은 12화를 기준으로 했다. 하지만 원작자 강풀이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하면서 16화 분량으로 수정됐고, 이후 다시 20화 분량으로 늘어났다. 원래
강풀 작가는 7화씩 에피소드가 묶이는 21화를 제안했다고 한다. 7화씩 묶은 3개의 시즌을 한 번에 보여주는 방식이라고 해도 좋겠다. 얼핏 형식적으로 유사해 보이지만 근본적인
차이는 20화 분량을 한 호흡에 만든다는 점이다. 하나의 이야기를 완성하고 다음 시즌을 확장해나가는 시즌제와 달리 애초에 시작점과 결말지점이 정해져 있는 상태에서 중간 구성을
7화씩 묶어 다른 결을 보여주는 건 완전히 다른 접근이다. <무빙>의 특색은 20화라는 많은 에피소드를 허용한 시점에 이미 결정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 시나리오 작성 과정 중 하나로 아이디어에서 시놉시스(약 A4 반 장~3장), 트리트먼트(약 A4 10장~15장)를 거쳐 최종 시나리오로 발전한다(민경원, 2014).
웹툰 <무빙>과 시리즈 <무빙> 포스터(사진출처: 카카오웹툰, 디즈니플러스)
2. ‘착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한 꾸러미로 묶은 종합선물 세트
충분한 분량을 확보한 <무빙>은 캐릭터의 사연을 세세하게 풀어내는 작업에 집중한다. 인물들의 이야기야말로 강풀 작품의 시작이자 끝이다. 강풀 작가는 “시작부터
끝까지 중요한 건 캐릭터였다. 웬만한 시즌제 드라마의 시즌3에 달하는 볼륨이다. 사실 시즌제로 해보고 싶기도 했지만 지금 방식도 나쁘진 않다. 무엇보다 인물의 사연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공간이 있어서 좋았다. 하고픈 말은 소박하지만 그걸 들려주는 사람과 사연은 방대하다”(송경원, 2023. 8. 17)고 말한다. 상영시간이 제한된 영화에서는
이를 축약, 선택, 삭제할 수밖에 없었지만, 시리즈로 무대를 옮기면서 비로소 제대로 장기를 발휘할 기회를 얻어낸 것이다.
<무빙>은 강풀 유니버스의 첫 출발이지만 세계관을 설명하고 세팅하는데 에너지를 쏟는 대신 바로 본론으로 시작한다. 애초에 세계관의 출발부터 영상화했다면
<타이밍>이 먼저 제작돼야 했지만 다채로운 신체능력자들의 활약을 선보인 <무빙>이 직관적인 영상화에 좀 더 최적화된 형태였기 때문이다. 사실 시간순을
따르지 않는 구성은 강풀 작품 전체에 반영돼 있다. 강풀 작품의 이야기 구성은 대체로 ‘사건-위기-과거-현재 위기 해결’의 구성을 따른다. 상황이 주어지고, 왜 그런 상황이
벌어졌는지에 대한 이유를 거슬러 올라가는 접근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궁금증을 유발하여 서스펜스를 만들어내는 것이 목적이지만 이렇게 과거로 돌아가는 플래시백 방식의 최대
효과는 각 캐릭터의 사연을 자세하게 전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캐릭터 중심의 작법에 최적화된 방식이라 해도 좋겠다. 다만 이렇게 캐릭터 하나하나에 애정을 쏟고 많은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선 몇 가지 선행 조건이 있는데, 그 중 첫 번째가 충분한 상영시간이다. <무빙>은 20화의 에피소드를 확보해 이를 해결한다.
더불어 <무빙>은 원작자가 직접 시나리오를 각색하는 과정에서 웹툰에서도 미처 풀지 못한 에피소드를 한층 더 꼼꼼하게 채워 넣는 유연함도 선보였다. 가령
프랭크(류승범)처럼 아직 웹툰으로도 등장하지 않은 캐릭터를 미리 끌어 당겨와 사용하기도 했다. 프랭크는 본래 준비 중이던 웹툰 <히든>에 나올 예정이었던 캐릭터다.
원작자의 거대한 세계관 안에서 캐릭터들을 끌고 와 자유롭게 배치할 수 있다는 점은 이른바 ‘유니버스’ 방식의 콘텐츠에서 세계관을 설득해 나가는 데 매우 효과적인 요소다.
이는 원작자가 직접 각본을 쓰면서 이어지는 세계관 전체를 통제할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한 장점이기도 하다. 초기 트리트먼트 단계에서 나온 여러 아이디어 중에는 관객에게
친절하게 설명하기 위해 시간 순서대로 따라가는 방향도 있었다고 한다. 국정원 요원 시절 부모들의 에피소드가 먼저 나오고 아이들의 에피소드로 순차대로 보여주는 전개였다.
하지만 강풀 작가는 초반이 다소 밋밋할지라도 아이들의 학교 에피소드가 먼저 등장해야 한다는 의지를 관철했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무빙>이
히어로물의 껍데기를 쓴 멜로”(임수연, 2023. 10. 12)였기 때문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하나하나 제대로 보여줄 수 있다면 오히려 초반에는 능력 각성 전인
아이들의 시점으로 가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이라는 판단이었다고 한다.
<무빙>은 캐릭터 하나, 관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자세히 다루는 사연의 드라마다. 이를 위해 과감히 택한 20부작이란 포맷은 자칫 호흡이 늘어져 지루하게 다가갈
위험도 있다. 그러나 <무빙>은 이제까지와 마찬가지로 캐릭터에 대한 집중을 통해 이러한 우려를 타개해 나간다. 전체 볼륨은 20부작이지만 학교를 무대로 한 2세대
아이들 파트, 과거 국정원을 무대로 한 부모들의 파트, 그리고 이 모든 인물들이 총출동하여 북한군과 충돌하는 파트까지 세 개로 구분된다. 시즌을 나눈 것처럼 현재, 과거,
현재를 오가며 명확한 구분을 시도한 것이다. 연출을 맡은 박인제 감독은 “7화까지는 거의 한 편의 영화라고 봐도 무방하다...(중략) 8화부터는 부모 세대의 이야기를 2화씩
묶어서 김두식(조인성)과 이미현(한효주), 장주원(류승룡)과 황지희(곽선영), 이재만(김성균)과 신윤경(박보경)의 사연을 보여준다. 중심이 되는 인물마다 장르적인 색깔이
조금씩 다르다.”라고 설명했다. 정원고등학교를 배경으로 김봉석(이정하), 장희수(고윤정), 이강훈(김도훈)까지 2세대 초능력자 3인방의 이야기를 다룰 땐 장르적으로 하이틴
로맨스를 중심으로 접근한다. 여기에 장희수가 전학하게 된 계기를 보여주는 과거사에서는 학원 폭력물의 거칠고 수위 높은 액션을 뼈대로 세운다. 강력한 힘을 지닌 이강훈의
에피소드는 전형적인 히어로 성장물의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요컨대 <무빙>은 장르의 종합선물 세트라 부를 만하다.
하이틴 로맨스, 학원 폭력물의 액션, 히어로 성장물까지. 요컨대 <무빙>은 장르의 종합선물 세트라 부를 만하다. (사진출처: 셔터스톡)
그 결과 <무빙>은 캐릭터를 중심으로 각 에피소드의 색깔을 명확하게 구분한다. 전체적으로는 20부작이지만 실제로는 캐릭터에 맞춘 개별 영화를 여러 편을 보는 것과
유사한 효과를 가져온다. 이는 8화 이후 부모 세대의 과거 파트로 들어가면 더욱 두드러지는데, 커플 별로 진한 멜로드라마, 첩보물, 누아르, 하드보일드 액션 등 다양한
장르적 개성을 차례로 선보인다. 20부작이라고 하지만 실은 여러 편의 영화를 차례로 보는 감각에 가까우며 이는 기존의 여타 시리즈보다는 차라리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와 같은
프렌차이즈 영화의 패턴을 닮았다. 일정 시차를 두고 개봉하는 영화처럼 디즈니플러스는 한 주에 에피소드 2개씩을 묶어 공개하는 전략을 취했다. 이러한 공개 방식 덕분에 해당
에피소드의 인물을 중심으로 한 개별 영화처럼 소비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상영시간으로 계산해보아도 약 100분에 가까운 한 묶음의 에피소드는 한 편의 영화라 부를만하다.
초능력별 혹은 사연별로 구분되는 각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한 과거 파트의 에피소드를 차례로 선보인 후 드디어 이들이 한자리에 모여 대규모의 스펙터클을 선사하는데, 이 또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어벤져스> 시리즈와 유사한 방식이다. 원래는 넷플릭스처럼 한 번에 공개하길 더 바랐다는 강풀 작가의 인터뷰로 미뤄 짐작하건대 애초에
의도한 방향성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빙>이 이야기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최신 유행을 좇아가는 시리즈의 흐름과는 동떨어진, 상당히 고전적인
일면을 선보였다는 사실을 부정하긴 어렵다. 아이러니하지만 조금은 촌스럽고 기본에 충실한 <무빙>의 태도야말로 이 작품이 성공적인 반응을 이끌어 낸 비결 중
하나다.
3. 새로움과 익숙함 사이의 진심
<무빙>이 다양한 장르의 종합선물 세트처럼 캐릭터별, 에피소드별로 개성을 뽐낼 수 있었던 건 반대로 이 작품 전반의 주제 의식과 톤이 균일하게 깔려 있기
때문이다. 강풀 작가와 박인제 감독이 여러 차례 밝혔듯이 <무빙>의 본질은 슈퍼히어로들의 활약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 서로를 아끼고 행복해지고자 하는 이야기다.
<무빙>의 드라마는 특별하지 않아서 특별하다. 보편적이고 익숙한 메시지를 능력자들의 개성에 맞춰 색다르게 뽑아냈을 따름이다. 내 옆의 가족, 소중한 사람을 지키고
싶은 사람이 곤경에 처했을 때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캐릭터가 도드라질수록 능력에 휘둘리기 쉽지만 <무빙>의 주인공들은 상식선에서 사고하고 행동한다.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할 줄 아는 용기,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손 내미는 마음은 그 어떤 극적 상황보다 설득력과 개연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무빙>이 전하는 감성은
소위 감각적인 유행과는 거리가 멀다. 익숙하고 소박하며 친절한 전개는 어찌 보면 촌스러울 정도다. 이 투박함이야말로 <무빙> 전반에 깔린 동일한 톤의 시선이다.
사람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착한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해도 좋겠다.
강풀 작가는 자신의 첫 번째 시리즈 각본 작업에서 정형화된 틀을 따르지 않았다. 달리 표현하자면 영상 각본의 작법을 흉내 내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늘 하던 대로 인물에
집중해 상황을 펼쳐 냈을 따름이다. “뒤늦게 드라마 각본들을 보면서 공부를 많이 했다. 하지만 결국 그 틀을 따라가는 게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 느꼈고 내가 쓸 수 있는
방식으로 접근했다. 글로 그림을 그렸다고 해야 할까, 동작 하나하나를 그림 묘사하듯 자세히 서술했다. 대사보다 지문이 훨씬 긴 독특한 형태의 각본이 나왔다. 어떤 건 한
화에 60페이지가 넘기도 했는데, 결국 그 모든 동작이 감정을 어떻게 더 잘 드러낼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었다.”(임수연, 2023. 10. 12) 그 결과 인물의 특색을
드러내는 묘사는 더욱 꼼꼼해졌는데, 때문에 에피소드별 러닝타임이 조금씩 길어지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이런 접근 방식에 대해 누군가는 투박하고 촌스럽고 설명적이라고 느낄
수도 있고, 반대로 드라마의 기본과 감정 표현, 인물 묘사에 충실한 이야기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건 변하지 않는 건 <무빙>이 기발한 연출이나
아이디어보다는 기본에 집중하는 성실한 이야기라는 사실이다. 때때로 변하지 않는 진심은 유행을 뛰어넘는다.
물론 이러한 탄탄한 드라마를 초능력이라는 아이디어와 결합해 흥미롭게 표현했다는 점도 간과해선 안 된다. 박인제 감독은 이를 “강풀 작가의 대본에는 시각적인 부분도 구체적으로
지시되어 있고 각주 부분엔 작가님이 직접 그림을 그려놓기도 했다. 다만 몇몇 실현 불가능한 동선들, 그날 배우들의 감정과 여러 우연의 조화에 따라 현장성을 반영해야 할
부분들은 충분히 열어놓고자 했다. 정말 좋은 순간들은 촬영장에서 탄생한다(김소미, 2023. 10. 12)”고 설명한다. 311회의 촬영 회차는 20부의 방대한 러닝타임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압축적인 현장이었음을 알 수 있는 증거다. 구체적인 감정 묘사와 정확한 이미지는 결국 하나의 길로 이어진다. <무빙>에는 스타일리쉬한 장면도
많지만, 클로즈업보다 익스트림 롱쇼트가 더 도드라지는 시리즈다. 현란한 화면 전환보다 긴 호흡과 넓은 시선으로 인물의 사소한 움직임까지 담아내는 것. <무빙>이
사람과 이야기를 바라보는 태도는 시나리오 너머 카메라 연출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오래되고 낡은 것이 아니라 검증된 것. 결국은 사람을 향한 사람들의 이야기. 이 기본에
충실한 클래식은 시간이 지날수록 믿음직한 광채로 빛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