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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에서 가상공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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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치 장벽’ 넘어선
K-배우들의 할리우드 도전기

할리우드는 오랫동안 많은 배우들의 ‘꿈의 무대’였다.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넘어 전 세계 문화 패권을 쥐고 있는 할리우드 작품에 출연한다는 자체가 엄청난 도전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한국 영화가 오스카상을 석권하고, K-드라마가 에미상을 수상하며, 케이팝이 빌보드 차트를 휩쓰는 등 K-콘텐츠가 전 세계인이 즐기는 주류 문화 반열에 올라서면서 K-배우들에 대한 ‘대접’이 완전히 달라졌다.
한국 배우들의 할리우드 진출사를 되짚어보면 초기에는 국내 시장을 평정한 톱스타들이 '마지막 관문'으로 할리우드의 문을 두드리거나 영어 구사 능력을 갖춘 교포 출신 배우들의 진출이 상대적으로 많았다. 늘 새로운 소재에 목말라하는 할리우드에서는 다양성의 확보 차원에서 다국적 배우들을 기용했고, 한국 배우들도 많은 선택지 중 하나였다. 하지만 최근에는 콧대 높은 마블 스튜디오를 비롯해 할리우드 메이저 제작사들이 한국의 유명 스타들에게 먼저 접촉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애플티비플러스의 드라마 <파친코>를 필두로 OTT를 중심으로 한국적 소재를 다룬 콘텐츠가 증가하면서 신인 배우들의 할리우드 진출도 많아졌다. 케이팝 시장이 국내가 아니라 해외 팬을 겨냥한 사업으로 폭이 넓어진 것처럼 이제 K-배우들의 무대도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로 확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은주 서울신문 기자
1. 1990년대 초창기 K-배우들의 할리우드 진출:
다양성 차원의 다국적 배우 기용
국내 배우 가운데 할리우드 진출의 원조로 꼽히는 이는 배우 박중훈이다. 영화 <나의 사랑 나의 신부>, <인정사정 볼 것 없다>, <돈을 갖고 튀어라>, <투캅스> 등으로 청룡영화상과 대종상을 수상하며 1990년대 충무로를 평정했던 ‘국민 배우’ 박중훈. 그는 1998년 랠프 헤메커(Ralph Hemecker) 감독의 B급 액션 영화 <아메리칸 드래곤(American Dragons)>(1998)에서 배우 마이클 빈과 공동 주연을 맡으면서 할리우드에 첫발을 내디뎠다.
박중훈의 본격적인 할리우드 진출작은 2002년 <찰리의 진실(The Truth about Charlie)>로 볼 수 있다. 영화 <양들의 침묵>으로 제64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5개 부문을 석권한 조나단 드미 감독(Jonathan Demme)의 연출작이다. 2000년 선댄스 영화제에서 <인정사정 볼 것 없다>를 관람한 드미 감독은 이명세 감독을 통해 박중훈에게 출연 제의를 했고, 시나리오를 읽은 박중훈은 미국에서 감독을 만난 자리에서 바로 출연을 결정했다.

영화 <찰리의 진실(The Truth about Charlie)> 포스터 (사진출처: 유니버셜 픽쳐스)

이 영화에는 마크 월버그(Mark Wahlberg), 팀 로빈스(Tim Robbins) 등 할리우드 스타들이 대거 출연했고 박중훈은 전직 미국 특수 첩보 요원인 ‘이일상’ 역을 맡았다. 유명 감독의 대작 영화에 캐스팅이 확정되자 그는 2001년 1월 대대적으로 기자회견을 열고 할리우드 진출을 알렸다. 이는 언론에 대서특필 될 정도로 당대의 큰 문화계 이슈였다. 당시 할리우드에는 주윤발, 이연걸 등 아시아 배우들의 진출이 활발해 박중훈은 이들의 계보를 잇는 또 다른 ‘대안’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영화의 흥행이 기대치를 밑돌면서 그의 도전은 쉼표를 찍었다.
인기 드라마 <올인>과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 등으로 아시아권에서 '뵨사마'로 불리며 한류스타로 등극한 톱스타 이병헌도 2009년 블록버스터 영화 <지.아이.조: 전쟁의 서막(G.I. Joe: The Rise Of Cobra)>을 통해 할리우드 진출을 알렸다. 그는 이 작품에서 비밀에 둘러싸인 무사 ‘스톰 쉐도우’ 역을 맡았는데 근육질 몸매와 현란한 검술 액션 연기를 선보여 글로벌 관객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영화 <지.아이.조: 전쟁의 서막(G.I. Joe: The Rise Of Cobra)> 포스터 (사진출처: CJ 엔터테인먼트)

이 작품은 전 세계에서 3억 달러의 흥행 수입을 올렸고 2013년 개봉한 속편인 <지.아이.조2>에서 이병헌의 비중은 전편에 비해 훨씬 커졌다. 1편에서 가면을 쓰고 감정을 숨기며 테러를 자행했던 스톰 쉐도우는 2편에서 캐릭터에 서사가 부여되며 남다른 존재감을 과시했다.
2. 2000년대~2010년대: (1) 아시아권 배우들의 캐릭터 전형성
2000년대 할리우드에서는 아시아 배우들이 성룡이나 이연걸처럼 액션신을 중점적으로 소화해주기를 바라거나 악역 또는 나약한 역할에 캐스팅하는 경우가 많았다. 때문에 할리우드에 진출하는 배우들은 이 같은 한계를 뛰어넘어 연기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과제를 늘 안고 있었다. 이병헌은 <지.아이.조2> 개봉 당시 인터뷰에서 “주변에서 ‘전형적인 모습으로 할리우드에 진출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있었고 개인적인 갈등도 있었다”면서 “언젠가는 내가 진정 원했던 이야기와 시나리오를 선택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아시아권 배우들에게 주어지는 캐릭터의 전형성에 대한 고민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하지만 이병헌은 탄탄한 연기와 수준급의 영어 실력을 바탕으로 한계를 뛰어넘는 노력을 기울였고 할리우드 스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2015년 <터미네이터: 제니시스(TERMINATOR: GENISYS)>에서 아놀드 슈워제네거(Arnold Schwarzenegger)와 호흡을 맞춘 것을 시작으로 <미스컨덕트(Misconduct)>(2016)에서는 알파치노(Al Pacino)와, <매그니피센트 7(The Magnificent Seven)>(2016)에서는 덴젤 워싱턴(Denzel Washington)과 에단 호크(Ethan Hawke)와 연기하며 할리우드에서 차근차근 인지도를 쌓았다. 그 결과 2016년에는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한국배우 최초로 무대에 올라 외국어영화상 부문을 시상하기도 했다.
드라마 <풀하우스>로 중화권에 신드롬적 인기를 누렸던 한류스타 비(정지훈)도 비슷한 시기에 두 편의 영화로 할리우드를 노크했다. 지난 2008년에 개봉한 영화 <스피드 레이서(Speed Racer)>와 이듬해에 개봉한 <닌자 어쌔신(Ninja Assassin)>(2009)을 통해서였다. <스피드 레이서>는 <매트릭스(The Matrix)>로 유명한 워쇼스키(Wachowski) 형제의 작품으로 젊은 레이서들의 목숨 건 질주를 그린 액션 블록버스터였는데 정지훈은 가문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신예 레이서 역을 맡았다.

영화 <닌자 어쌔신(Ninja Assassin)> 포스터 (사진출처: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이 작품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펼친 덕인지 정지훈은 워쇼스키 형제가 제작에 참여한 액션 영화 <닌자 어쌔신>에서 할리우드 첫 주연을 꿰찼다. <닌자 어쌔신>은 조직에 의해 비밀 병기로 키워진 남자의 거대한 복수극을 그린 액션 블록버스터다. 정지훈은 혹독한 체중 조절과 영화 <300>의 무술팀과 함께 훈련받은 뒤 탁월한 무예 실력과 고난도 액션 연기를 뽐냈다.
3. 2000년대~2010년대: (2) 여성 배우들의 할리우드 진출
남성 배우들 못지않게 여배우들의 할리우드 진출사도 화려하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원조 할리우드 스타 배우 김윤진이다. 그녀는 10살 때 미국으로 건너간 한국계 미국인으로, 무명 시절 직접 영화 및 드라마 제작사에 프로필을 보내고 오디션에 여러 차례 도전한 끝에 2004년 <로스트(Lost)>의 주연에 발탁됐다.

드라마 <로스트(Lost)> 시즌1 포스터 (사진출처: ABC)

비밀에 싸인 한국인 ‘선화’ 역으로 출연한 김윤진은 <로스트>의 시즌6까지 전 시즌에 함께 했고, 연이어 드라마 <미스트리스(Mistress)>에 주연급으로 캐스팅됐다. 김윤진은 일종의 개척자 정신을 가지고 해외 시청자들에게 한국인 캐릭터를 열정적으로 알리는 데 기여했다. 그 결과 <로스트>는 2006년 제63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TV시리즈 최우수 작품상을 받았다.
영화 <플란다스의 개>, <괴물>, <공기 인형>, <도희야> 등을 통해 개성 있는 연기로 충무로를 사로잡은 배두나도 국내 시장에 안주하지 않고 일찌감치 할리우드에 도전해 자리를 잡았다. 배두나는 2013년 워쇼스키 감독의 영화 <클라우드 아틀라스(Cloud Atlas)>(2013)에 출연한 것을 계기로 할리우드와 처음 인연을 맺었다. 그는 <주피터 어센딩(Jupiter Ascending)>과 넷플릭스 드라마 <센스8(Sence8)> 등 워쇼스키 감독이 연출한 작품에 오디션 없이 캐스팅되는 등 감독과 단단한 신뢰를 쌓았다. 배두나는 <센스8>에서 낮에는 투자회사 CFO, 밤에는 격투기 파이터로 변하는 캐릭터를 맡아 해외 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후 많은 해외 감독들의 러브콜을 받은 배두나는 영화 <300>과 <저스티스리그(Justice League)> 등을 연출한 할리우드 액션 거장 잭 스나이더(Zack Snyder) 감독의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레벨 문(Rebel Moon)>(2023)에 출연하며 새로운 도전을 이어가고 있다.

영화 <레벨 문(Rebel Moon)> 포스터 (사진출처: 넷플릭스)

지난해 말 공개된 이 작품에서 배두나는 뛰어난 검술의 무사 ‘네메시스’ 역을 맡았는데 검도복과 비슷한 의상과 갓을 연상시키는 모자를 쓴 비주얼을 선보여 눈길을 끌었다. 잭 스나이더 감독은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을 보고 영향을 받아 배두나의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의상에 드러나도록 배려했다는 후문이다.
한국계 미국인인 배우 수현은 국내보다 해외에서 먼저 알아본 사례다. 할리우드 오디션에 꾸준히 도전한 수현은 영화 <분노의 질주(The Fast And The Furious)>(2001) 오디션에 도전해 탈락했지만, 이를 계기로 블록버스터 영화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The Avengers: Age of Ultron)>(2015)에 캐스팅됐다. 이 영화에서 수현은 토니 스타크의 친구인 유전공학자 헬렌 조(Helen Cho) 역할로 출연했는데 제작진은 서울에서 로케이션을 진행할 정도로 한국에 대한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이후 수현은 <다크타워: 희망의 탑(The Dark Tower)>(2017)을 비롯해 <신비한 동물들과 그린델왈드의 범죄(Fantastic Beasts: The Crimes of Grindelwald)>(2018), 넷플릭스 드라마 <마르코 폴로(Marco Polo)> 시리즈 등 유명 할리우드 영화에 연이어 캐스팅됐다.
4. 2010년대 한류 흥행기: 할리우드로부터의 ‘역 러브콜’
국제적으로 한국 영화와 드라마에 대한 위상이 높아지면서 할리우드 거장 감독들의 한국 배우들에 대한 러브콜은 더 많아졌다. 대표적인 사례가 2014년 뤽 베송(Luc Besson) 감독의 <루시(LUCY)>로 할리우드에 진출한 배우 최민식이다.<제5원소(The Fifth Element)>(1997) 등을 연출한 거장 뤽 베송 감독은 <올드보이>와 <악마를 보았다> 등에서 최민식의 연기를 보고 매료돼 그를 캐스팅하기 위해 직접 방한했다.

영화 <루시(LUCY)> 포스터 (사진출처: UPI 코리아)

언어적인 장벽에 대한 우려가 제기됐지만, 뤽 베송 감독은 ‘미스터 장’ 역을 한국인으로 설정하고 한국어 대사도 무방하다는 입장을 보이는 등 최민식의 캐스팅에 정성을 쏟았다. <루시>는 평범한 삶을 살던 주인공 루시(스칼렛 요한슨)가 어느 날 모든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 두뇌와 육체를 완벽하게 컨트롤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최민식은 이 영화에서 루시를 끝없이 추격하는 악당 미스터 장 역할을 맡아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를 펼쳤다. 감독은 미스터 장 수하의 조직원들 역에도 대부분 한국인 배우들을 캐스팅하기도 했는데 작품은 제작비의 10배의 수입을 올리며 흥행에 성공했다.
세계적으로 폭넓은 마니아층을 확보한 마블 스튜디오도 한국 배우들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대표적인 인물이 마블 스튜디오의 영화 <이터널스(Eternals)>(2021)에서 슈퍼히어로를 연기한 배우 마동석이다. 영화 <부산행>을 통해 서구권에서 큰 관심을 받은 그는 <범죄도시> 시리즈 등에서 선보인 ‘마동석표’ 맨손 액션 연기를 할리우드에서 그대로 선보였다. 어린 시절 미국으로 이민을 가 헬스트레이너로 활동한 바 있는 그는 <이터널스>에서 인간을 돕는 초인 길가메시(Gilgamesh) 캐릭터를 맡아 안젤리나 졸리(Angelina Jolie)와의 케미스트리를 뽐내며 성공적으로 할리우드에 안착했다. 이후 다양한 작품에서 러브콜을 받은 마동석은 아예 할리우드에 제작사 ‘고릴라8프로덕션’을 차리고 현지 제작사와 함께 한국 드라마의 리메이크에도 뛰어들었다. 마동석은 OCN에서 방송된 바 있는 <트랩>을 리메이크한 미국 드라마 <더 클럽(The Club)>의 주연 및 제작자로 참여할 예정인데, 이 작품에는 유명 미드 <워킹 데드(The Walking Dead)>, <하우스 오브 카드(House of Cards)> 등을 집필한 세계적인 작가 겸 프로듀서인 잭 로귀디치(Jack LoGiudice)가 참여해 화제를 모았다. 마동석은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를 원작으로 한 할리우드 영화 <헬다이버(Hell Divers)>의 주연 및 제작자로 참여하는 등 할리우드와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2020년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국제영화상 등 4관왕을 수상하고, 2021년 배우 윤여정이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을 수상하면서 한국 영화와 K-배우들에 대한 입지는 완전히 달라졌다. 더 이상 우리나라 배우들이 프로필을 돌리고 ‘발품’을 파는 것이 아니라 ‘역 러브콜’이 많아진 것이다. 할리우드에서 캐릭터에 어울리는 배우의 프로필을 직접 요구하는 등 캐스팅 방식도 적극적으로 바뀌었다.
2023년 11월 개봉한 할리우드 영화 <더 마블스(The Marvels)>에는 배우 박서준이 캐스팅되면서 마블 유니버스에 탑승했다. 박서준은 캡틴 마블과 정략 결혼한 알라드나 행성의 ‘얀’ 왕자로 깜짝 출연했다. 105분의 러닝타임 가운데 박서준의 분량은 2분 40여 초로 짧았지만, 그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박서준은 "현장이 궁금해서 참여한 것이고 앞으로 못할 수도 있는 경험이라 생각하니 너무 소중했다"고 밝혔다. 또한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으로 아시아 배우 최초 에미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이정재는 2024년 올해 공개 예정인 <스타워즈(Star Wars)>의 새 시리즈에 합류할 예정이다. 그는 <스타워즈> 세계관의 100년 전 이야기를 다룬 디즈니플러스 드라마 <애콜라이트(The Acolyte)>에서 마스터 제다이 역을 맡아 할리우드 스타 자리를 예약했다. 머지않아 이정재가 광선검을 휘두르며 "포스가 함께하길"이라는 명대사를 하는 진귀한 장면을 목도하게 될 전망이다. 뿐만 아니라 미국 현지 기획사들이 한국 스타들과 전속 계약을 맺으면서 현지 진출을 모색하는 경우도 생겨났다. 강동원, 전종서 등은 미국 에이전시와 계약을 맺고 이미 할리우드 작품을 촬영하거나 제작 준비 중이고 이하늬, 한예리 등도 미국의 유명 에이전시와 매니지먼트 계약을 체결해 할리우드 진출을 모색하고 있다.
최근에는 OTT가 콘텐츠 시장 ‘태풍의 핵’으로 급성장하면서 K-배우들에게도 새로운 시장이 열렸다. 한국적 문화를 배경으로 한 콘텐츠가 대거 제작되면서 Z세대를 중심으로 해외시장을 적극적으로 공략하는 일명 ‘할리우드 키드’들이 탄생할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애플티비플러스 <파친코>의 주인공 역을 맡은 김민하다. 토종 한국인인 김민하는 재일조선인 4대에 걸친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그린 <파친코>에서 일제강점기 조선 여성 ‘선자’ 역을 맡아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당시 소속사도 없이 공고를 보고 오디션에 직접 부딪혔던 김민하의 도전 정신은 높이 살 만하다. 배우 최민영도 한국에서 인지도는 그리 높지 않았지만, 넷플릭스 시리즈 <엑스오, 키티(XO, Kitty)>를 통해 글로벌 스타로 발돋움했다. 이 드라마는 주인공 키티가 장거리 연애 중인 남자친구를 만나기 위해 한국으로 오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렸는데 작품에는 케이팝과 부채춤, 추석과 명절 음식 등 한국의 고유한 문화도 담겼다.
5. K-배우들의 ‘코리안 인베이젼’, 어디까지 왔을까?
2024년 새해 벽두에는 스티븐 연(Steven Yeun, 한국이름 연상엽)이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성난 사람들(BEEF)>로 한국계 배우 최초 골든글로브 남우주연상을 거머쥐는 쾌거를 이뤘다. 5살 때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영화 <미나리>(2021)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후 한국인의 끈질긴 생명력으로 땅을 개척하는 제이콥 이(Jacob Yi) 역을 맡아 열연을 펼쳤다. 봉준호 감독의 <옥자>와 이창동 감독의 <버닝> 등 한국 영화는 물론 할리우드 작품에 출연한 스티븐 연은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정체성에 대한 깊은 고민과 한국어와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것이 배우로서 큰 자양분이 됐다.

넷플릭스 시리즈 <성난 사람들(BEEF)> 포스터 (사진출처: 넷플릭스)

최근 글로벌 OTT에서 만든 콘텐츠에 한국적 소재가 자주 차용되면서 한국 배우들에게 언어는 더 이상 큰 장애물이 아니다. 일부 제작진은 배우들에게 더 많은 한국어 대사를 요구하거나, 한국어 대사를 굳이 영어로 바꿀 필요가 없다는 분위기까지 포착되고 있다. K-콘텐츠와 한국 문화에 대한 호감도 상승이 가져다준 효과다. 이는 BTS나 블랙핑크 등 케이팝 그룹의 콘서트장에 가면 현지 해외 팬들이 한국어로 노래를 따라 부르는 것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이제 K-콘텐츠는 정서적으로 비슷한 아시아권뿐만 아니라 미국이나 유럽, 아프리카 등에서도 수용 격차가 줄어들면서 문화 할인율이 점차 낮아지고 있다. 여기에는 앞선 기획력과 절제되면서도 세련된 스타일, 그리고 완성도 높고 매력적인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K-크리에이티브’가 한몫을 차지했다. 배우를 비롯해 작가와 감독 등 수많은 창작자가 한국인 특유의 근성과 끈기로 고부가가치 창작물을 만들어내면서 ‘코리안 인베이젼’이 가능해진 것이다. 봉준호 감독이 말했듯 ‘1인치의 장벽’은 허물어지고 OTT와 유튜브 등 미디어의 발달로 전 세계 문화는 더욱 긴밀하게 연결되고 있다. 2024년에는 언어와 문화적 장벽이 더욱 급속도로 허물어지고 콘텐츠 본연의 힘이 더욱 강조될 것이다. 그 중심에 K-배우들이 있다. 갑진년 청룡의 해에 한국 배우들이 ‘1인치 장벽’을 과감히 넘고 힘차게 비상하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