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1일은 스페인을 상대로 독립을 선포한 필리핀 제1공화국(First Philippine Republic)이 아시아 최초 공화국 헌법이자 필리핀 최초의 성문헌법인 ‘말로로스 헌법(Malolos Constitution)’을 제정한 날이다. 필리핀 혁명 정부 의회는 1898년 9월 15일 말로로스 바라소아인 성당(Barasoain Church)에 모였고, 여기서 헌법 초안을 마련했다. 펠리페 칼데론 이 로카(Felipe Calderón y Roc)가 이끄는 위원회는 1899년 1월 20일 의회 승인을 받고, 다음 날인 1월 21일에 ‘말로로스 헌법’을 공포했다. 이어서 1월 23일, 의회를 거쳐 에밀리오 아기날도(Emilio Aguinaldo)가 대통령으로 추대되며 필리핀 공화국 출범이 선포되었다.
1962년 디오스다도 마카파갈(Diosdado Macapagal) 대통령은 이날의 헌법적인 가치를 기리기 위해 1월 21일을 ‘시민 자유의 날(Civil Liberties Day)’로 선포한 바 있다. 현재는 비록 이 날이 법정공휴일은 아니지만, 매년 이 시기가 되면 필리핀 전역에 있는 학교와 공공기관에서는 민주주의 뿌리를 되새기는 다양한 학술 행사와 기념식이 열린다. 특히 헌법 제정지인 말로로스에서는 매년 1월 중순부터 1월 23일 전후까지 ‘피에스타 리퍼블리카(Fiesta Republica)’라는 이름으로 첫 헌법 제정 및 공화국 출범과 관련하여 다채로운 역사 및 문화적인 행사를 열고 있다.
이렇듯 필리핀 독립 역사와 밀접한 말로로스 헌법은 올해로 제정 127주년을 맞이했다. 비록 필리핀의 공식적인 ‘헌법 제정 기념일(Constitution Day)’은 피플 파워 혁명(People Power Revolution) 이후 현대 민주주의의 기틀을 확립한 1987년 2월 2일로 지정되어 기념되고 있으나, 역사적인 시각에서 1월 21일이 갖는 무게감은 결코 그에 뒤처지지 않는다. 1899년 1월 21일은 필리핀이 수백 년에 걸친 스페인의 식민 지배와 서구 열강의 압제를 뚫고, 아시아 최초로 공화국이자 동시에 스스로 주권 국가임을 전 세계에 당당히 선포한 상징적인 날이다. 사실 필리핀 제1공화국은 동년 2월 4일에 발발한 필리핀-미국 전쟁 속에서 짧은 역사를 뒤로하고 사라졌지만, 그 정신만큼은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다.
1888년에 세워진 바라소아인 성당은 필리핀 역사에서 단순한 종교 시설이 아니라, 스페인의 오랜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열망이 집약된 장소이다. 바라소아인 성당은 바로크(Baroque) 르네상스(Renaissance) 양식을 기반으로, 19세기 유럽에서 신고전주의 요소들이 가미되어 유행되었던 조형미를 자랑한다. 이 성당은 1973년 대통령령으로 국가적 보호·보존 대상인 국립 성지(National Shrine)로 공식 지정됐으며, 이곳이 종교적 성지를 넘어 국가적 유적지가 됐다. 바라소아인 성당이 특히 중요한 이유는 말로로스 헌법, 필리핀 제1공화국 수립, 첫 대통령 취임식을 비롯하여 필리핀 민주주의와 공화국 탄생과 관련되어 있는 상징적 무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곳 바라소아인 성당이 필리핀인들에게 갖는 의미는 한국인들이 상해 임시정부 청사나 천안 독립기념관을 바라보는 마음과 맞닿아 있다.


< (좌) 첫 헌법이 탄생한 바라소아인 성당, (우) 바라소아인 성당에 있는 에밀리오 아기날도 초대 대통령 동상 - 출처: 통신원 촬영 >
이처럼 말로로스 헌법과 제1공화국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필리핀의 민주주의가 ‘수입된 제도’라기보다 그들의 투쟁 속에서 태어난 것임을 알 수 있다. 20세기 후반 한국이 군부독재를 극복하고 민주화로 나아가는 과정과 마찬가지로, 시민 자유와 헌법적 권리는 단순히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거리와 광장에서 쟁취한 성과였다. 양국 모두 헌법을 단순한 법전이 아니라 ‘시민이 투쟁을 통해 획득한 권리’로 상징화해 왔다는 점에서, 그리고 외부 압력 속에서 국가와 헌정 질서를 지키고자 했다는 점에서 헌법과 민주주의를 둘러싼 서사는 문화와 정체성을 관통하는 공통 분모가 된다. 특히 1986년 필리핀 '피플 파워(People Power)' 혁명과 이듬해 한국에서 일어난 '6월 민주항쟁'은 두 나라 모두 독재에 맞서 민주화를 쟁취한 경험을 공유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역사 경험은 오늘날 대중문화, 특히 한류를 통해 새로운 방식으로 번역되고 유통되고 있다. 한국 드라마와 영화, 케이팝은 표면적으로는 로맨스와 청춘 그리고 가족 서사를 중심에 두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산업화와 도시화 과정에서 벌어지는 계급 갈등, 군사정권과 민주화 이후 정치적인 긴장, 냉전과 분단이라는 아픔이 복합적으로 스며 있다. <택시운전사>, <1987>과 같은 영화나 <미스터 션샤인(Mr. Sunshine)>과 같은 드라마는 필리핀 시청자들에게도 깊은 울림을 전한다. 필리핀 청년들이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속 의병들 투쟁을 보며 눈시울을 붉히는 것은 바로 그 화면 속에서 과거 말로로스 벌판을 가로지르며 항쟁하던 선조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택시운전사>나 <1987> 같은 영화는 부모 세대가 페르디난드 마르코스(Ferdinand Marcos)의 독재에 맞섰던 기억을 소환하며, 한류를 단순한 한국 문화가 아닌 아시아 공통의 서사로 격상시킨다.
말로로스에 열리는 ‘피에스타 리퍼블리카’가 필리핀의 헌법과 공화국 탄생을 다양한 문화 행사, 공연, 시민 참여 프로그램과 결합해 ‘살아 있는 역사’로 재구성하듯, 한국에서도 각종 역사 기념일과 도시 축제, 지역 박람회에서 케이팝 공연과 드라마·영화 촬영지 행사, 팬 미팅이 결합되면서 한류는 일종의 국가·도시 브랜드이자 공공외교 수단으로 기능하고 있다. 축제에는 중앙정부와 지방정부만이 아니라 기획사와 방송사, 상인, 팬 커뮤니티 등으로 다층화되며, 과거 정치인 중심이었던 ‘기념의 정치’가 일반 시민과 청년 세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문화적 장’으로 전환된다.
이러한 변화는 한류를 통해 아시아 내 서로 다른 식민 경험과 민주화 경로 그리고 경제·사회 구조를 지닌 국가들 사이에 어떤 새로운 공감과 긴장이 형성되고 있는지를 살펴보게 만든다. ‘말로로스 헌법’과 바라소아인 성당이 필리핀인들에게 의미가 있듯, 한류는 한국 사회가 걸어온 역사적인 궤적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이자 동시에 필리핀을 비롯한 주변 아시아 국가들이 자신들이 처한 현재와 과거를 되돌아볼 수 있는 참조점이 된다. 결국 각기 다른 경로를 거쳐 도달한 민주주의와 역사를 한국의 대중문화를 통해 문화적 언어로 재구성하여, 서로 공감하고 연대할 수 있는 시대로 나아가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사진출처 및 참고자료
- 통신원 촬영
- 《라이프스타일 인콰이어(Lifestyle Inquirer)》 (2015. 02. 28). Fiesta Republica: Blast from the past,
https://lifestyle.inquirer.net/185870/fiesta-republica-blast-from-the-past/
- 《마닐라 불리틴(Manila Bulletin)》 (2022. 01. 19). Asia's cradle of freedom,
https://mb.com.ph/2022/1/19/asias-cradle-of-freedom
- 《데일리 트리뷴(Daily Tribune)》 (2026. 01. 17). The First Republic and the Modern Rogue,
https://tribune.net.ph/2026/01/17/the-first-republic-and-the-modern-rogu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