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2월 17일은 한국의 음력 1월 1일 설날이다. 올해 한국의 설날인 이날은 우연히도 이탈리아에서도 가톨릭 전통에서 매우 중요한 날과 겹친다. 2월 17일은 이탈리아에서 카니발의 대미를 장식하는 ‘기름진 화요일(Martedì Grasso)’이다. 이어 다음 날인 2월 18일은 ‘재의 수요일(Mercoledì delle Ceneri)’이다. ‘기름진 화요일(Martedì Grasso)’과 ‘재의 수요일(Mercoledì delle Ceneri)’은 이탈리아를 비롯한 가톨릭 문화권에서 겨울이 끝나고 봄이 오는 길목에 치르는 가장 중요한 전례적·문화적 관문으로 여겨진다.
이탈리아인들에게 이 시기는 화려한 축제의 가면을 벗고 가장 낮은 자리로 임하는 성찰의 시간으로 받아들여진다. 17일 ‘기름진 화요일’은 금욕의 절기인 사순절(Quaresima)에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마음껏 먹고 즐기는 날이다. 카니발(Carnevale)이라는 단어 자체가 라틴어 ‘카르네 발레(Carne vale, 고기여 안녕)’에서 유래했듯, 이날 자정을 기점으로 육체적 쾌락과 풍요를 뒤로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중세 가톨릭 교회법에 따르면 사순절 기간에는 육류뿐 아니라 달걀, 우유, 치즈, 동물성 기름 등의 섭취가 엄격히 금지됐다. 냉장 기술이 없던 시대에는 사순절이 시작되기 전 집에 남아 있는 기름진 식재료를 모두 소진해야 했기 때문에, 이는 낭비를 막기 위한 ‘마지막 만찬’의 성격으로 굳어졌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기름진(Grasso)’ 화요일이라는 명칭이 붙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베네치아의 유명한 가면축제(Carnevale di Venezia)는 ‘기름진 화요일’에 열리는 가장 유명한 축제 - 출처: Tuscany Now and More>
이튿날인 18일 ‘재의 수요일(Mercoledì delle Ceneri)’부터는 엄숙한 사순절(Quaresima)이 시작된다. 이 전통은 4세기경 초기 교회에서 비롯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중죄를 지은 이들이 사순절 기간 동안 거친 옷을 입고 머리에 재를 뿌리며 공적인 참회 의식을 치렀는데, 이러한 관습이 8~10세기에 이르러 모든 신자가 참여하는 보편적 예식으로 정착됐다고 알려져 있다. ‘재의 수요일’에는 신자들의 머리나 이마에 재를 얹는 중요한 의식이 거행된다. 이때 사용되는 재는 단순히 태운 가루가 아니다. 전년도 ‘주님 수난 종려 주일’에 축복해 사용했던 종려나무 가지를 1년간 보관했다가 태워 만든 것이다. 승리와 환희를 상징했던 종려나무가 한 줌의 재로 변하는 과정은 인간 존재의 덧없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구약 성경에서도 재는 깊은 슬픔과 회개를 상징하는 도구로 사용됐다. 사제가 신자의 이마에 재로 십자가를 그으며 “사람아,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기억하여라”라고 말하는 전통은 11세기 교황 우르바노 2세 때부터 공식적으로 권고된 유서 깊은 관습으로 전해진다.

< ‘재의 날’ 열리는 이마에 재를 얹는 중요한 의식 - 출처: Fraternità di San Francesco >
이 시기 이탈리아 전역에서는 전통의 두 얼굴을 마주할 수 있다. 특히 로마에서는 교황이 집전하는 참회 행렬이 상징적인 장면으로 꼽힌다. 교황은 산탄셀모 성당에서 기도를 올린 뒤, 맨발이나 간소한 차림의 신자들과 함께 산타 사비나 대성당까지 행진한다. 화려한 로마 거리에서 이마에 검은 재를 얹은 채 묵묵히 걷는 인파의 모습은 이 시기에만 볼 수 있는 경건한 장관으로 평가된다.
반면 밀라노를 중심으로 한 롬바르디아 지역은 독특한 ‘암브로시오 전례(Rito Ambrosiano)’를 따른다. 수호성인 성 암브로시오를 기다리며 축제를 연장했다는 전설에 따라, 밀라노에서는 18일 이후에도 토요일까지 카니발이 이어진다. 이를 ‘사바토 그라소(Sabato Grasso, 기름진 토요일)’라 부르며, 밀라노 두오모 광장은 여전히 축제의 열기로 가득 찬다.
이탈리아인들에게 재의 날과 사순절은 단순한 종교적 의무를 넘어 삶의 박자를 조율하는 문화적 장치로 기능한다. 사순절이 시작되면 이탈리아의 식탁은 눈에 띄게 소박해진다. 많은 이들이 자발적인 단식과 금육에 동참하고, 평소 즐기던 술이나 디저트를 절제한 뒤 그 비용을 어려운 이웃을 돕는 ‘자선’에 사용한다. 이러한 관습은 공동체의 유대감을 확인하는 문화적 행위로 자리 잡았다.
한국의 설날이 묵은해를 보내고 새로운 복을 맞이하는 ‘채움’의 미학이라면, 이탈리아의 재의 날은 스스로를 낮추고 욕망을 덜어내는 ‘비움’의 미학으로 비유된다. 2026년 2월, 이탈리아는 화려한 가면을 벗고 가장 진솔한 모습으로 돌아가 고요하면서도 뜨거운 봄을 준비하고 있다.
사진출처 및 참고자료
- Carnevale di Venezia 홈페이지, https://www.tuscanynowandmore.com/discover-italy/italy-and-the-italians/carnevale-di-venezia
- Mercoledì delle Ceneri 홈페이지, https://www.ordinefrancescano.it/event/mercoledi-delle-ceneri/
- San Romano 홈페이지, https://www.sanromano.org/san-romano-testi/omelia-di-papa-francesco-nella-celebrazione-del-mercoledi-delle-ce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