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 5월 7일 오후 2시, 필리핀 세부 인근에서 울려 퍼진 총성은 한 국가 지도자의 생을 마감하는 신호탄이었다. 일제에 의해 처형된 인물은 당시 필리핀 대법원장이던 호세 아바드 산토스였다. 총구 앞에 선 그는 죽음의 순간에도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 일본군이 건넨 안대와 마지막 담배를 모두 거절한 채, 공직자로서의 품위와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켰다는 증언이 전해진다.1886년 2월 19일 필리핀 빰빵가 산 페르난도에서 태어난 산토스는 미국에서 법학을 수학했다. 이후 필리핀인으로는 최초로 필리핀 국립은행 전속 변호사를 지냈으며, 법조계에서 경력을 쌓아 대법원장에 올랐다.
태평양전쟁 발발 후 일본이 필리핀을 침공하자, 당시 대통령이던 마누엘 L. 케손은 그에게 미국 망명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산토스는 이를 거절하고 가족과 함께 조국에 남는 길을 선택했다. 1942년 4월 12일 세부 인근에서 일본군에 체포된 그는 점령군으로부터 괴뢰 정부에 협조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이에 대해 그는 “그런 명령을 따르는 것은 반역자가 되는 것이오. 치욕스럽게 사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소!”라고 밝히며 협조를 거부했다. 처형장으로 향하는 순간, 곁에서 오열하는 아들에게 남긴 말도 전해진다. 그는 “울지 말아라, 페피토. 일본군들에게 네가 용감하다는 것을 보여주렴. 조국을 위해 죽을 수 있다는 것은 내게 드문 기회란다. 이런 기회가 모든 이들에게 있는 것은 아니지(Do not cry, Pepito. Show these people that you are brave. It is a rare opportunity for me to die for our country. Not everyone is given that chance).”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산토스 대법원장의 죽음은 일제 강점기 필리핀 역사에서 저항과 양심의 상징으로 기록되고 있다.


< (좌)앙헬레스 박물관 앞에 있는 호세 아바드 산토스 대법원장 동상, (우)앙헬레스 법원에 있는 호세 아바드 산토스 대법원장 동상 -
출처: 통신원 촬영 >
앙헬레스 지역의 앙헬레스 박물관(Museo ning Angeles) 앞에서 만난 두 필리핀 청년은 산토스 대법원장에 대해 각별한 존경심을 드러냈다. 대학생이라고 밝힌 마크 씨는 “산토스 대법원장은 우리에게 단순한 역사 속 인물이 아닙니다. 어떤 압력 앞에서도 굴하지 않는 ‘필리핀 정신’을 상징하는 존재죠(Chief Justice Santos is more than just a figure from the history books to us. He is the embodiment of the Filipino spirit, someone who refused to yield under any pressure.)”라고 말했다. 곁에 있던 친구 마리아 씨도 공감을 표했다. 그는 “처형 직전 그가 남긴 말은 언제나 저를 울컥하게 합니다. 조국을 위해 죽는 것을 기회라고 표현하는 그 의연함이 정말 놀랍습니다(Just before his execution always move me to tears. His fortitude to describe dying for one's country as an opportunity is truly remarkable).”라고 덧붙였다. 이처럼 현지 청년들 사이에서 산토스 대법원장은 단순한 역사적 인물을 넘어, 국가적 자존과 용기의 상징으로 기억되고 있다.
현재 필리핀에서 유통되는 화폐 가운데 가장 고액권인 1,000페소 지폐는 1991년부터 발행되기 시작했다. 특히 2017년까지 유통된 구권 1,000페소 지폐 왼쪽 상단에는 호세 아바드 산토스의 초상이 새겨져 있다. 그의 모습은 단순한 인물 초상을 넘어, 죽음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았던 필리핀의 자존심을 상징하는 존재로 평가된다. 이 지폐에는 산토스 대법원장 외에도 두 명의 인물이 함께 담겨 있다. 1910년 필리핀인 최초로 미 육군사관학교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한 빈센트 림 장군이 그중 한 명이다. 중국계 필리핀인인 그는 필리핀 보이스카우트 창립에 기여한 7인 가운데 한 명으로도 알려져 있다. 지폐 하단에 함께 등장하는 호세파 랴네스 에스코다는 필리핀 걸스카우트 창립자이자 여성 참정권 확립을 위해 힘쓴 인물이다. 사회운동가로 활동하며 여성의 권리 신장에 앞장섰던 그는 일제 점령기 동안 협조를 거부하다 희생된 것으로 전해진다. 이들 세 인물은 모두 일본 점령기에 협력을 거부했다가 살해됐으며, 시신조차 수습되지 못한 비극적 운명을 공유하고 있다. 한편, 에스코다의 남편인 안토니오 에스코다 역시 투옥됐다가 빈센트 림 장군과 함께 처형된 것으로 추정된다. 1,000페소 지폐는 이처럼 일제에 맞서 저항한 인물들의 희생과 정신을 기리는 상징적 매체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죽음 앞에서도 굴하지 않았던 호세 아바드 산토스 대법원장이 보여준 기개는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절개와도 맞닿아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전문가들은 그의 선택이 단순한 개인의 결단을 넘어, 식민 지배에 맞선 민족적 저항의 상징으로 읽힌다고 분석한다. 한국이 35년간 일제 강점기를 견뎌냈듯, 필리핀 역시 태평양전쟁 기간 일본군 점령 아래에서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호주를 거쳐 미국으로 탈출하는 대신 조국에 남는 길을 택한 산토스 대법원장의 결정은, 독립을 위해 헌신한 한국의 의사·열사들과 궤를 같이한다는 평가다. 회유와 압박을 끝내 거부하고 대의를 지켜낸 그의 신념은 특정 국가를 넘어 보편적 가치로 조명된다. 학계에서는 이를 두 나라가 공유하는 역사적 경험과 저항 정신의 교차점으로 해석하며, 양국이 미래 협력의 토대를 다지는 데 있어 상징적 자산이 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시공간을 넘어 이어지는 이러한 정신적 유산은, 한·필리핀 양국이 공유하는 역사적 기억이자 앞으로 함께 나아갈 기반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 (좌)구권 1000페소 지폐에 있는 산토스 대법원장, 림 장군 그리고 에스코다, (우)마닐라에 있는 빈센트 림 장군 동상 - 출처: 통신원 촬영 >
양국은 전쟁이라는 아픈 상처를 공유하며 더욱 단단한 동반자로 발전해왔다. 필리핀은 1949년 아세안 국가 가운데 가장 먼저 대한민국과 정식 수교를 맺었다. 이후 6·25전쟁이 발발하자 미국과 영국에 이어 세 번째로 전투병을 파병했다. 총 7,420명에 달하는 필리핀군은 한국군과 함께 전선에서 싸웠으며, 이 과정에서 전사 112명, 부상 299명의 인명 피해를 입었다. 전쟁 초기부터 전후 복구 시기까지 쌀과 설탕, 혈장 등 의료물자, 코코넛 오일, 의류 등 다양한 구호 물자를 지원했으며, 특히 식량난에 시달리던 한국 민간인들에게 필리핀이 보낸 쌀과 설탕은 실질적인 도움이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같은 헌신은 호세 아바드 산토스 대법원장이 생전에 지키고자 했던 ‘자유와 신념’의 가치가 국경을 넘어 연대로 확장된 사례로 해석된다. 한국 역시 이러한 지원에 대한 감사를 바탕으로 경제 발전 과정에서 축적한 경험을 공유하고, 기술 및 인력 교류를 확대해 왔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 맺어진 인연은 점차 상호 번영을 위한 경제 협력 관계로 진화했다.
2024년 말 한·필리핀 자유무역협정(FTA)이 정식 발효되면서 양국 관계는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한국은 필리핀 품목의 94.8%에 대해, 필리핀은 한국 품목의 96.5%에 대해 관세를 철폐하기로 하면서 반도체와 자동차를 중심으로 교역이 더욱 활발해지고 있다. 다만 양국을 긴밀히 묶는 동력은 단순한 경제 지표에 그치지 않는다는 분석도 나온다. 한국 드라마는 필리핀에서 가족애와 인간적 서사로 공감을 얻고 있으며, 케이팝은 현지 청년층의 일상과 문화 속에 깊숙이 자리 잡았다. 이는 문화적 교류가 경제 협력을 넘어 양국 관계의 또 다른 축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80여 년 전 산토스 대법원장이 목숨을 걸고 지키려 했던 ‘자유로운 세상’의 가치 위에서, 양국은 이제 전쟁을 넘어 문화와 경제로 이어지는 협력의 가교를 놓고 있다. 전쟁 속에서 싹튼 우정은 오늘날 상호 신뢰와 공감이라는 자산으로 이어지며, 양국의 미래를 비추는 토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사진출처 및 참고자료
- 통신원 촬영
-《Inquirer》(2019. 4. 29). Death of a martyr, https://opinion.inquirer.net/121021/death-of-a-marty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