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국제예술축제(Singapore International Festival of Arts, 이하 SIFA) 2026에서 국립극단의 연극 <헤다 가블러(Hedda Gabler)>가 현지 관객을 만났다. 5월 15일부터 30일까지 열린 올해 SIFA는 싱가포르 전역의 공연장과 공공장소에서 연극, 무용, 음악, 전시, 참여형 프로그램 등을 선보였다. 일부 무료 공연과 전시도 함께 마련돼 축제 기간 시민들이 도심 곳곳에서 예술을 접할 수 있었다.
그중 한국 국립극단의 <헤다 가블러>는 5월 28일부터 30일까지 싱가포르 국립도서관 건물 내 드라마 센터 시어터(Drama Centre Theatre)에서 공연됐다. 사실 한국 연극이 SIFA 무대에 오른 사례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17년에는 국립극장과 협업한 <보이스 오브 밀레니엄(Voice of Millennium)>이 SIFA에서 소개된 바 있다. 그러나 이후 약 9년 만에 한국 국립극단의 대표 레퍼토리가 SIFA 주요 공연 프로그램으로 다시 현지 관객과 만났다는 점에서 이번 공연은 주목할 만하다. 한국 공연예술이 케이팝이나 한국 드라마 중심의 한류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싱가포르 관객에게 다가간 사례로 볼 수 있다.
노르웨이 극작가 헨리크 입센(Henrik Ibsen)의 고전 희곡을 바탕으로 한 이 작품은 결혼 제도와 사회적 시선 속에서 욕망과 억압, 선택과 파국을 마주하는 여성 헤다 가블러의 내면을 다룬다. 이번 공연은 한국어로 진행됐으며 영어 자막이 함께 제공돼 현지 관객들이 작품을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됐다.
< 공연 시작 전 드라마 센터 시어터(Drama Centre Theatre) 입구 모습 - 출처: 통신원 촬영 >

< 공연장 내부에 게시된 <헤다 가블러> 홍보물 - 출처: 통신원 촬영 >
공연 당일 드라마 센터 시어터는 관객들로 가득 찼다. 통신원은 마지막에 나온 취소표를 통해 3층 객석에서 공연을 관람할 수 있었다. 무대와 다소 거리가 있어 배우들의 세밀한 표정까지 확인하기는 어려웠지만, 객석 전체의 분위기와 반응을 살펴보기에는 좋은 위치였다. 1층부터 3층까지 좌석은 거의 빈자리 없이 채워졌고, 공연 시작 전부터 관객들은 프로그램북을 읽거나 동행인과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개막을 기다렸다. 싱가포르 현지 관객들이 한국 연극 공연을 보기 위해 공연장을 가득 메운 장면은 한국 공연예술의 해외 수용 가능성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 헤다 가블러 공연 포스터 - 출처: 싱가포르 국제예술축제 홈페이지 >
공연이 시작되자 관객들은 차분하게 무대에 집중했다. 인물 간 대화와 심리 변화가 중요한 작품인 만큼 빠른 장면 전환보다는 배우들의 호흡과 대사, 무대 위 긴장감이 중심을 이뤘다. 한국어 대사와 영어 자막이 함께 제공되는 방식이었지만, 관객들은 자막을 따라가면서도 배우들의 움직임과 감정 변화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주인공 헤다 역을 맡은 배우 이혜영의 존재감은 3층 객석에서도 분명하게 느껴졌다. 헤다가 느끼는 답답함과 불안, 조롱 섞인 여유와 폭발 직전의 긴장이 무대 위에서 반복되며 관객들의 시선을 붙잡았다.
인상적이었던 점은 한국적 코미디 요소에 대한 관객들의 반응이었다. 작품은 무거운 주제를 다루지만, 인물 간 어긋나는 대화와 상황의 아이러니에서 비롯되는 웃음의 순간도 적지 않았다. 현지 관객들은 이러한 장면에서 함께 웃으며 공연을 즐겼다. 문화적 배경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억눌린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불편한 유머와 인물의 어색한 태도는 관객에게 자연스럽게 전달됐다. 이는 언어가 다른 공연이라도 배우의 리듬과 표정, 상황의 구조가 싱가포르 관객들에게 충분히 전달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

< 헤다 가블러 공연 후 출연진들의 커튼콜 모습 - 출처: 통신원 촬영 >
이번 공연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지점은 헤다 가블러라는 인물을 둘러싼 관객들의 해석이었다. 헤다는 단순히 이해하기 쉬운 인물은 아니다. 그녀는 주변 사람들을 조종하려 하고 자신의 불안과 욕망을 파괴적인 방식으로 드러낸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당대 사회가 여성에게 허용한 제한된 선택지 안에서 숨 막히는 삶을 견뎌야 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공연이 끝난 뒤 로비와 주변 공간에서는 헤다의 행동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를 두고 이야기를 나누는 관객들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일부 관객은 “헤다라는 인물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을 보였고, 다른 관객들은 “당시 상황을 생각하면 답답함이 어느 정도 이해된다”는 의견을 나눴다.
현장에서 바로 옆에 앉아 있던 인도계 싱가포르인 부부는 작품에 대해 “내용이 다소 난해한 부분도 있었지만 한국 배우들의 연기력과 연출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이들은 한국어 공연을 영어 자막으로 관람하는 방식이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배우들의 감정 표현과 무대 분위기 덕분에 충분히 몰입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특히 여성의 자유와 결혼, 임신, 사회적 기대를 둘러싼 장면들은 관객들의 대화를 이끌어낸 주요 소재로 보였다.
싱가포르 역시 저출산과 가족 가치관의 변화를 겪고 있는 사회다. 싱가포르 통계청에 따르면 2025년 거주자 합계출산율은 0.87까지 하락했다. 결혼과 출산을 둘러싼 사회적 기대, 개인의 선택, 세대 간 가치관 차이는 싱가포르에서도 꾸준히 논의되는 주제다. 이러한 맥락에서 <헤다 가블러> 속 임신과 결혼, 여성의 역할을 둘러싼 대사는 단순히 19세기 유럽 고전의 문제로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관객들이 관련 장면에서 함께 웃고 공연 후 의견을 나누는 모습은 작품이 던지는 질문이 오늘날 싱가포르 사회의 고민과도 맞닿아 있음을 보여줬다.
물론 헤다 가블러의 선택과 행동은 오늘날의 관점에서도 쉽게 옹호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번 공연은 그를 선악의 구도로 단순하게 판단하기보다, 한 여성이 자신에게 주어진 제한된 삶의 조건 속에서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보여줬다. 한국 국립극단의 무대는 이 고전을 한국 배우들의 언어와 신체, 정서로 새롭게 해석했고, 싱가포르 관객들은 이를 자국 사회의 현실과 개인적 경험에 비추어 받아들였다.
SIFA는 싱가포르를 대표하는 공연예술 축제다. 축제 기간에는 유료 공연뿐 아니라 무료 공연, 전시, 참여형 프로그램도 함께 열려 예술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고 있다. 올해 축제의 다양한 프로그램 가운데 한국 연극 <헤다 가블러>가 주요 공연장 객석을 가득 채웠다는 점은 의미가 있다. 이는 한국 공연예술이 케이팝이나 한국 드라마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현지 관객과 만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무대 위에서 한국어로 말해진 고전의 대사는 영어 자막을 거쳐 싱가포르 관객에게 전달됐고, 관객은 그 안에서 여성, 결혼, 자유, 선택이라는 보편적 질문을 발견했다.

< 영어 자막을 띄워주는 공연장 양옆 스크린 - 출처: 통신원 촬영 >
이번 공연은 한국 연극의 해외 진출이 단순히 한국 작품을 소개하는 차원을 넘어 현지 사회와 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싱가포르 관객들이 헤다의 선택을 두고 의견을 나누고, 한국 배우의 연기와 연출에 주목한 장면은 한국 공연예술이 아시아 공연예술 플랫폼 안에서 더욱 확장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SIFA 무대에 오른 <헤다 가블러>는 고전의 재해석이 국경과 언어를 넘어 동시대 관객과 어떻게 호흡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사례였다.

< 공연 종료 후 드라마 센터 시어터를 나서는 관객들 - 출처: 통신원 촬영 >
< 공연 종료 후 드라마 센터 시어터를 나서는 관객들 - 출처: 통신원 촬영 >
사진출처 및 참고자료
- 싱가포르 국제예술축제 홈페이지 중 <헤다 가블러> 소개 부분, https://buly.kr/614JP0v
- 싱가포르 국제예술축제 홈페이지 중 2026 축제 소개 보도자료 (2026.03.12). Singapore International Festival of Arts 2026 sets the stage for "Let’s Play!", https://buly.kr/28vdp4J
- «스트레이츠 타임스(The Straits Times)» (2026.04.29). Dive into the Singapore International Festival of Arts 2026: A guide to the premieres and highlights, https://buly.kr/APxFvP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