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대표 공연예술 공간 '에스플래나드(Esplanade Theatres on the Bay)'의 야외 광장에 놓인 침대 하나가 관객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처음에는 공연장 주변을 지나던 사람들이 하나둘 멈춰 서는 정도였지만, 공연이 진행될수록 '에스플래나드 포어코트 가든(Esplanade Forecourt Garden)' 주변은 관객들로 가득 찼다. 아이들은 움직이는 침대가 등장할 때마다 신기한지 몸을 앞으로 기울였고, 어른들은 배우의 몸짓과 표정, 오브제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공연이 끝난 뒤에는 배우와 사진을 찍기 위해 관객들이 줄을 서는 모습도 이어졌다.
지난 5월 29일부터 31일까지 싱가포르 '에스플래나드'에서 한국 공연 단체 '마린보이'의 <항해(Voyage)>가 현지 관객을 만났다. 이번 공연은 '에스플래나드'가 주최하는 '플립사이드 2026(Flipside 2026)' 프로그램의 하나로, 별도 티켓 없이 누구나 무료로 관람할 수 있는 야외 공연으로 진행됐다. 공연은 5월 29일과 30일 오후 6시 30분과 9시, 31일 오후 6시 30분에 열렸으며, 공연 시간은 약 35분이었다.


< 공연 현장 - 출처: '마린보이' 제공 >



< 공연 현장 - 출처: '마린보이' 제공 >

< 싱가포르 에스플래나드 포어코트 가든에서 열린 마린보이의 'Voyage' 공연 현장 - 출처: 통신원 촬영 >
이 공연은 움직이는 침대에 오른 한 남자가 꿈과 현실 사이를 오가며 자신의 기억과 관계, 이루지 못한 약속을 마주하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침대는 단순한 생활 공간을 넘어 주인공이 살아온 시간과 감정을 담는 무대 장치로 기능했다. 배우는 침대 위에서 곡예를 하고, 바람과 기억, 만남과 이별을 떠올리게 하는 공연을 이어갔다. 침대가 움직일 때마다 관객의 시선도 함께 이동했고, 무대와 객석의 경계가 자연스럽게 허물어졌다.
무엇보다 이 공연에서 두드러진 점은 대사가 없었다는 것이다. 배우는 말 대신 몸짓, 표정, 음악, 오브제(물체, objet)의 움직임으로 이야기를 전달했다. 대사가 없는 공연은 관객에게 하나의 정해진 해석을 제시하기보다 각자의 경험에 따라 장면을 받아들일 여지를 남긴다. 실제 현장에서도 관객들은 같은 장면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해석했다. 한 관객이 동행인에게 "정신병원이 배경인 것인가"라고 묻자, 다른 관객은 "주인공이 병을 앓고 있고, 무대 위 장면은 그가 꾸는 꿈처럼 보인다"라고 답했다. 이처럼 이 공연은 명확한 대사 없이도 관객이 스스로 의미를 구성하게 하며, 꿈과 현실 사이를 오가는 작품의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한 듯했다.
공연 초반에는 주변을 지나던 사람들이 잠시 멈춰 서서 무대를 바라보는 정도였다. 그러나 침대가 움직이고 배우가 몸짓으로 장면을 확장하자 관객들이 점차 무대 앞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공연 중반 이후에는 광장 주변에 가족 단위 관객, 관광객, 현지 시민들이 층층이 둘러섰다. 일부 관객은 휴대전화를 들어 공연 장면을 촬영했고, 어린이 관객들은 침대가 움직일 때마다 웃거나 손짓하며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별도의 객석이 정해지지 않은 야외 공연이었지만, 관객들은 자연스럽게 원형에 가까운 관람 공간을 만들며 공연에 참여했다.
< 움직이는 침대를 중심으로 관객들이 모여든 공연 장면 - 출처: 통신원 촬영 >
현장에서 만난 한 관객은 "한국 공연인 줄은 몰랐는데, 움직이는 침대와 시각적 효과가 신기하고 재미있었다"라고 말했다. 그는 "기술적 장치가 눈에 띄게 드러나기보다 공연 안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어 흥미로웠고, 배우의 표정 연기도 인상적이었다"라고 덧붙였다. 또 다른 관객은 "대사가 없어도 이해하기 어렵지 않았다"라며 평소 한국 드라마를 즐겨 본다고 말했다. 이 관객에게 공연은 드라마나 대중음악과는 다른 방식으로 한국 문화를 접한 경험이 됐다.
싱가포르는 영어, 중국어, 말레이어, 타밀어가 공용어로 쓰이는 다언어 사회다. 이러한 환경에서처럼 언어보다 이미지와 몸짓에 기반한 공연은 다양한 배경의 관객과 만나는 데 강점이 있다. 현장에서 관찰한 관객층도 다양했다.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 젊은 관객, 중장년층, 외국인 관광객이 함께 공연을 지켜봤다. 특히 어린이 관객의 반응이 두드러졌다. 배우가 침대 위에서 중심을 잃은 듯 움직이거나, 침대가 예상과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는 장면에서는 아이들이 크게 웃었다. 성인 관객들도 장면의 유머와 리듬에 맞춰 웃음을 보였다.

< 공연 후 어린이 관객을 움직이는 침대에 태우고 관객들에게 인사하는 장면 - 출처: 통신원 촬영 >
이번 공연은 한류가 케이팝과 한국 드라마를 넘어 공연예술의 영역으로 확장되는 흐름을 보여주는 현장이기도 했다. 기존 한류 콘텐츠가 주로 온라인 플랫폼이나 상업 공간을 통해 소비됐다면, 이번 공연은 싱가포르 도심의 공공 예술 공간에서 현지 시민들과 직접 만났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무료 야외 공연이라는 형식은 공연을 보기 위해 일부러 찾아온 관객뿐 아니라 우연히 그 공간을 지나던 사람들에게도 한국 공연예술을 접할 기회를 제공했다.
공연이 끝난 뒤 관객들이 곧바로 자리를 떠나지 않은 점도 인상적이었다. 일부 관객은 배우에게 박수를 보낸 뒤 무대 가까이 다가가 사진 촬영을 요청했다. 공연 후 사진을 찍기 위해 줄을 선 장면은 현지 관객의 호응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순간이었다. 관객들은 작품의 줄거리를 모두 같은 방식으로 해석하지는 않았지만, 움직이는 침대와 배우의 몸짓, 유머와 감정의 리듬을 통해 공연의 핵심 정서를 공유했다.

< 공연 종료 후 배우와 사진을 찍기 위해 줄을 선 관객들 - 출처: 통신원 촬영 >
'마린보이'는 서커스와 거리 예술, 오브제 극의 요소를 결합해 관객과 만나는 공연 단체다. 이번 공연에서도 기술은 공연을 설명하기 위한 장치로 전면에 드러나기보다, 침대의 움직임과 장면 전환 속에 자연스럽게 배치됐다. 이는 시각적 장치가 단순한 볼거리에 그치지 않고 인물의 내면과 기억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기능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에스플래나드의 야외 광장은 싱가포르 시민에게 익숙한 문화 공간이다. 이곳에서 열린 공연으로 인해 특정 언어를 공유하지 않아도 공연예술이 관객과 만날 수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언어는 달랐지만, 몸짓과 이미지, 음악, 오브제는 관객에게 직접적으로 전달됐다. 싱가포르의 저녁 광장을 채운 웃음과 박수는 한국 공연예술이 현지 공공 무대에서 관객과 소통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이번 공연은 한국 공연예술의 해외 진출이 반드시 대형 공연장이나 유료 티켓 중심의 방식으로만 이뤄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시사한다. 공공장소에서 열린 짧은 야외 공연은 현지 시민이 부담 없이 한국 창작 공연을 접하게 했고, 관객의 자연스러운 참여와 반응을 끌어냈다. <항해(Voyage)>는 말보다 몸짓과 이미지로 관객에게 다가가며, 다언어 사회 싱가포르에서 한국 공연예술의 확장 가능성을 보여줬다.
- 본 공연은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 <케이-아츠 온더고(K-arts on the GO)>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www.k-go.or.kr)
사진출처 및 참고자료
- 통신원 촬영
- '마린보이' 제공
- 에스플래나드(Esplanade), Voyage, https://www.esplanade.com/whats-on/festivals-and-series/festivals/2026/flipside/events/voy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