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요식업계에서 햄버거는 가장 대중적인 메뉴 중 하나다. 현지에서 '막도(McDo)'라는 친근한 별칭으로 불리는 맥도날드(McDonald's)를 비롯해 버거킹(Burger King), 웬디스(Wendy's) 등 글로벌 패스트푸드 업체들이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 외국계 브랜드를 제치고 압도적인 점유율을 자랑하는 주인공은 바로 필리핀 ‘국민 패스트푸드’ 졸리비(Jollibee)다. 졸리비는 바나나 케첩을 활용한 달콤한 스파게티와 치킨조이(ChickenJoy)를 앞세워 시장을 장악했다. 여기에 달콤짭짤한 양념이 특징인 '얌버거(Yum Burger)'와 대형 패티를 사용한 '챔프 버거(Champ)'로 필리핀 소비자들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 그 외에도 트로피컬 헛(Tropical Hut), 작스 버거(Zark's Burgers), 아미네이비(ArmyNavy), 불리 버거(Bully Burger), 브라더스 버거(Brothers Burger) 등이 각기 다른 소비자층을 확보하며 시장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대형 쇼핑몰을 중심으로 형성된 외식 시장 이면에는 서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독자적인 '길거리 버거' 시장이 존재한다. 밥을 주식으로 삼는 필리핀인들에게 버거는 한 끼 식사라기보다 식사 사이 허기를 달래는 간식인 '메리엔다(Merienda)'나 야식에 가까운 음식이다. 길거리 버거 브랜드들은 이러한 틈새 시장을 가성비와 철저한 현지화 전략으로 공략했다.
세 업체 가운데 가장 먼저 1981년에 설립된 '버거 머신(Burger Machine)'은 "잠들지 않는 버거(The Burger That Never Sleeps)"라는 별명으로 유명하다. 미국의 푸드트럭 문화에서 영감을 받아 낡은 미니버스를 개조해 주유소 인근에서 판매를 시작했으며, 필리핀 최초의 24시간 버거 가판대로 알려져 있다. 버거 머신은 필리핀 국내총생산(GDP)의 약 8%를 차지하고 있는 BPO(콜센터 외주 중심) 산업 종사자들과 운전기사들의 심야 식사를 책임지며 성장했다. 실제로 깊은 밤 주유소 옆이나 대로변을 걷다 보면 화려한 조명 사이로 지글지글 패티 굽는 냄새와 함께 버거 머신의 주황색 가판대를 쉽게 만날 수 있다. 매연과 열기 속에서도 야간 근무를 마친 직원들과 지프니 운전기사들이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버거로 허기를 달래는 모습은 필리핀 밤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다

< 미니트 버거에서 구매 중인 소비자들 - 출처: 통신원 촬영 >

< 조리 중인 미니트 버거들 - 출처: 통신원 촬영 >
1982년 설립된 '미니트 버거(MINUTE BURGER)'는 '바이 원 테이크 원(Buy 1 Take 1, 한국의 1+1의 개념)' 전략을 앞세워 소비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최근에는 '밈 장인(Meme Lord)'으로 불릴 만큼 소셜미디어(SNS)를 활용한 마케팅을 활발히 전개하며 젊은 세대와 소통하고 있다.
1997년 설립된 '엔젤스 버거(Angel's Burger)'는 초기 사업 실패를 겪었지만, 창업주 부부가 미국 라스베이거스 카지노에서 딴 1만 달러를 바탕으로 재기에 성공한 영화 같은 사연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대중의 버거(Burger ng Bayan)'라 불리는 엔젤스 버거는 현재 필리핀에서 가장 많은 매장을 운영하는 서민형 버거 브랜드다. 단돈 몇십 페소만 있으면 버거 두 개를 살 수 있는 덕분에 하교 시간만 되면 주머니 사정이 가벼운 학생들이 동전을 쥔 손으로 버거를 받아 드는 모습을 필리핀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미니트 버거'는 철저한 현지화 전략과 서민 맞춤형 가격 책정을 통해 필리핀 소비자들 사이에서 확실히 자리를 잡았다. 필리핀 빰방가(Pampanga) 지역의 전통 돼지고기 요리를 접목한 '포크 시식 버거(Pork Sisig Burger)'를 2개에 단돈 98페소(약 2,400원)에 선보이며 소비자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은 것이 대표적이다. 새콤하고 짭짤하게 볶아낸 다진 돼지고기 요리인 '시식(Sisig)'을 넣어, 한입 베어 물면 굳이 밥이 없어도 필리핀인들이 좋아하는 맛이 입안 가득 퍼지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중동풍 비프 샤와르마 버거, 남미풍 크리스피 치킨 치미추리 버거 등 이국적인 맛을 필리핀 대중의 입맛에 맞게 변형해 제공하고 있다. 필리핀에서 태어난 통신원의 아들 역시 집 근처 길거리 버거 가판대를 자주 찾는다. 처음에는 주머니 사정이 가벼운 학생들이 즐겨 찾는 'Buy 1 Take 1'의 가성비에 이끌리는 듯했지만, 어느새 현지 양념이 가미된 버거 맛에 익숙해진 모습이다. 주변 필리핀 지인들 역시 대형 프랜차이즈 버거들 못지않게 필리핀식 양념 및 먹거리를 사용하는 길거리 버거를 선호한다. 이를 보며 철저한 현지화와 가성비를 무기로 삼은 필리핀 길거리 버거가 현지인의 입맛을 얼마나 강하게 사로잡고 있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여기에 현지 소비 시장을 관통하는 또 다른 특징은 한류를 활용한 소비문화 마케팅이다. '미니트 버거'는 2021년 현지 한류 열풍에 발맞춰 한국 감성을 접목한 '크레이지(K-Razy)' 캠페인을 전개했다. 버거와 함께 즐길 수 있도록 출시한 'K-Razy 밀크티'는 달콤한 동과와 쫄깃한 나타 젤리를 조합해 젊은 소비자층을 겨냥했다. 특히 '우울한 겨울(This K-Razy! Winter Melancholy)'을 콘셉트로 고객이 직접 한국 드라마 엔딩 크레딧 장면을 연출하고 공유하는 사용자 제작 콘텐츠(UGC) 이벤트를 진행해 온라인상에서 관심을 모았다. 손가락 하트 등 한국식 감성 요소를 적극 활용한 홍보 콘텐츠는 소셜미디어를 통해 확산됐으며, 브랜드와 소비자 간 소통을 강화하는 계기가 됐다.

< 미니트 버거가 차용한 한류를 활용한 홍보 방식 - 출처: 미니트 버거 페이스북 계정 >

< 미니트 버거가 차용한 한류를 활용한 홍보 방식 - 출처: 미니트 버거 페이스북 계정 >
이는 필리핀 소비자들에게 한국 문화가 단순한 유행을 넘어 '세련되고 즐거운 일상 속 문화'로 자리 잡았음을 보여준다. 또한 향후 한국 버거 브랜드가 필리핀 시장에 진출할 때 한류를 마케팅 요소로 활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한국 버거 프랜차이즈들의 필리핀 시장 진출 움직임도 이어지고 있다. 2019년 마스터 프랜차이즈 계약으로 진출했던 '맘스터치'는 코로나19 대유행과 현지 시장 분석 부족 등의 영향으로 철수했으나, 이후 일본·몽골·라오스 등지에서 사업을 확대하며 필리핀 재진출 가능성을 내비치고 있다. '롯데리아' 역시 필리핀 진출 계획을 공식화하고 향후 5년 내 30개 매장 개설을 목표로 제시한 바 있다.
돼지고기나 소고기에 비해 가격이 저렴한 닭고기 소비 비중이 높은 필리핀 시장에서 한국식 치킨버거와 프리미엄 버거는 경쟁력을 갖출 수 있는 품목으로 평가된다. 다만 현지 가성비 길거리 버거 브랜드와의 가격 경쟁이나 높은 시장 점유율을 확보한 졸리비와의 직접적인 경쟁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한국 브랜드들은 차별화된 메뉴와 브랜드 경험을 앞세운 중고가 외식 시장 공략에 집중할 가능성이 크다.
필리핀에서 무한 리필 삼겹살과 한국식 치킨 등 한국 음식은 '세련된 외식 경험'으로 인식되고 있다. 여기에 필리핀 소비자들이 선호하는 단맛과 양념 문화를 고려하면 두툼한 통닭넓적다리살 패티를 사용하는 맘스터치의 '싸이버거'와 불고기 양념을 활용한 롯데리아의 '리아버거' 등은 현지 소비자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메뉴로 꼽힌다. 또한 필리핀인의 식문화를 반영해 '버거 패티+밥+그레이비소스' 조합 등을 메뉴에 접목하는 현지화 전략도 고려해볼 수 있다. 한국 식문화에 대한 높은 호감도와 문화적 친숙함을 바탕으로 현지 식습관을 반영한 제품을 선보인다면, 한국 버거 브랜드들은 필리핀 외식 시장에서 차별화된 입지를 구축할 가능성이 있다.
사진출처 및 참고자료
- 통신원 촬영
- 미니트 버거(Minute Burger) 페이스북 계정, https://www.facebook.com/MinuteBurg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