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연·박해수 <벚꽃동산>, 뉴욕 한복판에 피어나다
- 한국어로 만나는 체호프… 파크 애비뉴 아모리 북미 초연, 11회 전석 매진 -

< 전도연, 박해수 주연의 연극, ‘벚꽃동산’이 맨해튼 파크 애비뉴 아모리 홀에서 성황리 공연되었다 - 출처: 엘지 아트센터 공식 인스타그램 계정(@lgartscenter) >
한국 배우 전도연과 박해수가 안톤 체호프의 고전 <벚꽃동산>을 한국어로 들고 뉴욕 무대에 올라 현지 관객들의 뜨거운 호응을 이끌어냈다. 서울에서 출발한 한국어 연극이 세계 공연예술의 중심지 뉴욕으로 무대를 옮긴 이번 공연은 단순한 해외 공연을 넘어, 한국 배우와 창작진이 세계적인 고전을 한국적 정서와 동시대적 시각으로 재해석해 미국 관객에게 선보였다는 점에서 주목받았다.
사이먼 스톤이 각색·연출한 <벚꽃동산>은 지난 9월 16일 맨해튼(Manhattan)의 대표적인 공연예술 기관인 파크 애비뉴 아모리(Park Avenue Armory)에서 북미 초연돼 9월 26일까지 공연됐다. 특히 총 11회 공연 일정의 티켓이 모두 사전에 매진되면서 높은 관심을 입증했다. 공연이 펼쳐진 웨이드 톰슨 드릴 홀(Wade Thompson Drill Hall)은 약 1,200석 규모로, 좌석 규모를 단순 계산하면 11회 공연을 통해 최대 약 1만 3,200석에 해당하는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다.
뉴욕 대표 실험공연 공간, 파크 애비뉴 아모리

< 뉴욕의 대표적인 공연 예술 공간, 파크 애비뉴 아모리 - 출처: 위키피디아 웹사이트 >
이번 공연의 무대인 파크 애비뉴 아모리는 일반적인 브로드웨이 극장과는 성격이 다르다. 이곳은 1877~1881년 뉴욕 주방위군 제7연대의 무기고로 지어진 역사적인 건물로, 현재는 전통적인 극장이나 미술관에서 구현하기 어려운 대규모·실험적 공연과 시각예술을 선보이는 비영리 예술기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건물 내부에는 루이 컴포트 티파니, 스탠퍼드 화이트, 허터 브라더스 등이 설계한 역사적인 공간도 남아 있다.
특히 이번 공연이 펼쳐진 웨이드 톰슨 드릴 홀(Wade Thompson Drill Hall)은 약 5만 5,000제곱피트 규모의 기둥 없는 대형 공간으로, 천장 높이가 약 80피트에 달한다. 일반적인 프로시니엄 극장과 달리 작품의 성격에 따라 객석과 무대의 위치와 형태를 새롭게 구성할 수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처럼 전통적인 극장 형식을 벗어난 공간에서 한국어로 공연된 <벚꽃동산>은 장소 자체부터 뉴욕 관객에게 색다른 공연 경험을 제공했다.
러시아 귀족에서 한국 재벌가로

< 관객들에게 제공된 ‘벚꽃동산’의 팸플릿 - 출처: 통신원 촬영 >
사이먼 스톤은 체호프가 1904년 완성한 원작의 기본 구조를 가져오면서도 이야기를 현대 한국으로 옮겼다. 러시아의 몰락해 가는 귀족 가문은 이번 작품에서 여러 세대에 걸쳐 기업과 부동산을 소유해 온 한국의 부유한 가문으로 바뀌었다. 가족의 집과 정원이 경매에 넘어갈 위기에 놓이는 원작의 상황은 기업과 부동산을 둘러싼 현대 한국 가족의 이야기로 다시 태어난다. 과거의 영광에 머물러 있는 가족과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자수성가한 기업가의 대립은 체호프가 그렸던 구질서와 새로운 시대의 충돌을 현대 한국 사회의 언어로 치환한다.

< 11회 모든 공연이 매진된 전도연, 박해수 주연의 ‘벚꽃동산’ - 출처: 엘지 아트센터 공식 인스타그램 계정(@lgartscenter) >
≪뉴욕타임스(New York Times)≫는 이번 작품을 ‘현대 한국에 뿌리를 둔’ <벚꽃동산>으로 소개하면서, 사이먼 스톤이 러시아의 1900년대 초반을 21세기 한국으로 옮겨 작품의 변화와 세대 간 간극을 새롭게 바라봤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뉴욕타임스≫ 리뷰에서는 스톤이 서양의 전통적인 체호프 해석에서 변화가 비교적 느리게 진행되는 것과 달리, 한국 사회에서는 변화의 속도가 훨씬 빠르다는 점에 주목했다고 전했다.

< 사이먼 스톤의 연출, 김사울의 무대 디자인, 장영규의 음악으로 완성한 한국판 ‘벚꽃동산’ - 출처: 엘지 아트센터 공식 인스타그램 계정(@lgartscenter) >
“훤히 들여다보이는 집”… 유리벽이 된 가족의 사생활
이번 공연에서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배우들만이 아니다. 무대 한가운데에는 건축가이자 디자이너인 사울 킴(Saul Kim)이 설계한 거대한 투명 유리집이 자리한다. 기하학적인 형태의 미니멀한 집은 거실과 침실, 계단, 옥상 등으로 구성돼 있다. 배우들은 투명한 공간 안에서 생활하고 갈등하고 사랑한다. 관객들은 마치 집 안을 들여다보듯 인물들의 사적인 삶을 지켜본다. 파크 애비뉴 아모리 역시 이 유리집을 통해 관객이 등장인물들의 사적인 삶을 들여다보는 듯한 구조에 주목했다.

< 사울 킴이 디자인한 ‘벚꽃동산’의 투명 유리집 무대 - 출처: 엘지 아트센터 공식 인스타그램 계정(@lgartscenter) >
≪뉴욕 스테이지 리뷰(New York Stage Review)≫ 역시 사울 킴이 만든 거대한 유리벽의 집을 주요한 시각적 요소로 꼽았다. 유리벽이 등장인물들의 취약함을 그대로 드러내는 장치라고 평가하면서, 거의 3시간에 이르는 공연에서도 한국어 대사와 영어 자막을 통해 관객들이 작품의 코미디와 감정을 따라갈 수 있다고 전했다. 유리집 안에서 배우들은 거실과 침실, 옥상, 계단, 앞마당 등을 오가며 이야기를 펼친다. 결국 투명한 집은 가족의 부와 사생활을 상징하는 동시에, 가족들이 숨기고 싶어 하는 감정과 갈등까지 관객에게 그대로 노출시키는 하나의 거대한 무대 장치로 기능한다.

< 계급과 가족의 모습을 드러내는 사울 킴의 투명 유리집 무대- 출처: 엘지 아트센터 공식 인스타그램 계정(@lgartscenter) >
영화음악부터 이날치까지… 장영규가 만든 소리
음악과 사운드 디자인은 한국 영화와 공연음악을 넘나들며 활동해 온 장영규 음악감독이 맡았다. 장영규는 영화 <도둑들>, <곡성>, <부산행> 등의 음악 작업에 참여했으며, 이날치의 <범 내려온다>로 대중에게도 널리 알려졌다. 이번 <벚꽃동산>에서 음악은 단순히 장면을 뒷받침하는 배경음악에 머물지 않는다. 유리로 둘러싸인 공간과 배우들의 움직임, 현대 한국 가족이 만들어 내는 긴장감을 소리로 연결하며 작품의 분위기를 구축한다.

< 100% 한국어로 진행된 ‘벚꽃동산’의 무대 - 출처: 통신원 촬영 >
공식 크레딧에는 사이먼 스톤의 각색·연출을 비롯해 사울 킴의 무대 디자인, 멜 페이지의 의상 및 협력 무대 디자인, 제임스 판컴의 조명 디자인, 장영규의 음악·사운드 디자인, 이단비의 드라마터지가 이름을 올렸다.
뉴욕 언론도 주목한 한국어 체호프
한국어 공연이라는 점 때문에 뉴욕 관객이 작품을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우려는 실제 공연에서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연극은 전부 한국어로 진행됐지만 영어 자막이 제공됐고, 관객들은 대사와 함께 배우들의 표정과 움직임을 보며 이야기를 따라갔다. 공연 마지막에는 객석에서 기립박수가 이어졌다.

< ‘뉴욕 스테이지 리뷰’로부터 별 4개 평가를 받은 ‘벚꽃동산’ 뉴욕 공연- 출처: ‘뉴욕 스테이지 리뷰’ 웹사이트 >
미국 주요 언론의 평가도 이어졌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의 연극평론가 찰스 이셔우드는 이번 작품을 가을 연극 시즌의 시작을 알리는 “놀라운 작품”으로 평가하며, 이번 시즌이 이 작품과 함께 “고무적이고, 더 나아가 숨이 멎을 만큼 인상적인” 출발을 했다고 썼다. ≪뉴욕 스테이지 리뷰≫는 멜리사 로즈 베르나르도의 리뷰에서 별 4개를 주며, 사이먼 스톤의 한국어 버전이 시대와 장소를 바꾸면서도 체호프 원작의 중심적인 정서를 유지했다고 평가했다. 특히 한국어 공연임에도 웃음이 끊이지 않는 점과 배우들의 앙상블을 높이 평가했다. ≪보그(Vogue)≫는 이번 작품을 21세기 서울로 옮겨온 ‘급진적인’ 체호프 재해석으로 소개하면서 한국 사회의 계층 구조와 체호프가 그렸던 사회 변화의 문제를 연결했다. 특히 사울 킴의 유리집 세트가 마치 거대한 인형의 집을 들여다보는 듯한 독특한 시각적 경험을 만들어낸다고 소개했다.

< 뉴욕 곳곳에 걸린 ‘벚꽃동산’의 포스터 - 출처: 통신원 촬영 >
반면 ≪뉴욕타임스≫는 스톤의 새로운 해석이 체호프 원작과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다는 점에도 주목했다. 이처럼 이번 공연은 단순히 체호프를 한국적 배경으로 옮겨놓은 작품이라기보다, 원작의 기본적인 구조를 바탕으로 현대 한국 사회의 변화와 계층, 가족, 자본의 문제를 새롭게 들여다본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서울에서 시작해 뉴욕으로… 한국 연극의 새로운 무대
<벚꽃동산>은 2024년 서울 엘지(LG)아트센터에서 초연된 작품이다. 이후 해외 무대로 확장됐고, 이번에는 파크 애비뉴 아모리에서 북미 초연으로 뉴욕 관객을 만났다. 전도연에게는 칸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 이후 자신의 연기 영역을 다시 한 번 확장하는 무대였으며, 박해수에게도 <오징어 게임>을 통해 전 세계에 이름을 알린 이후 한국어 연극으로 뉴욕 관객과 직접 만나는 특별한 무대가 됐다.

< 전도연·박해수 주연 ‘벚꽃동산’의 뉴욕 공연 공식 팸플릿 - 출처: 통신원 촬영 >
체호프가 120여 년 전 러시아의 몰락하는 귀족 가문을 통해 시대의 변화를 바라봤다면, 사이먼 스톤의 <벚꽃동산>은 그 질문을 오늘의 서울로 옮겼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다시 서울을 떠나 뉴욕 한복판에 도착했다. 한국어로 말하고, 한국 배우들이 연기하며, 한국의 가족과 기업, 세대와 계층의 이야기를 담은 <벚꽃동산>. 거대한 유리집 안에 갇힌 가족의 모습을 뉴욕 관객들은 지켜봤다. 언어는 달랐지만 변화 앞에서 과거를 놓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 가족을 둘러싼 사랑과 갈등,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미련은 낯설지 않았다.

< 한국 연극의 세계 무대 진출 가능성을 보여준 ‘벚꽃동산’ - 출처: 파크 애비뉴 아모리 웹사이트 >
한국어 연극 <벚꽃동산>이 뉴욕에서 보여준 것은 단지 한국 배우들의 해외 진출만이 아니다. 세계적인 고전을 한국적 시선으로 다시 해석하고, 그 이야기를 세계 공연예술의 중심지에서 관객과 공유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이번 <벚꽃동산>의 뉴욕 공연은 한국 연극이 세계 무대에서 기존의 고전을 새로운 시선으로 해석하고, 동시대의 이야기를 만들어 갈 수 있음을 보여주는 무대가 됐다.
사진출처 및 참고자료
- 통신원 촬영
- 위키피디아(Wikipedia) 웹사이트,
https://en.wikipedia.org/wiki/Park_Avenue_Armory
- 뉴욕 시어터 가이드(New York Theatre Guide) 웹사이트,
https://www.newyorktheatreguide.com/show/47487-the-cherry-orchard
- 엘지(LG) 아트센터 공식 인스타그램 계정(@lgartscenter),
https://www.instagram.com/p/C70SXKONKAs/?img_index=1
- 파크 애비뉴 아모리(Park Avenue Amory) 웹사이트,
https://www.armoryonpark.org/season-events/2026-season/the-cherry-orchard/
- ≪뉴욕타임스(The New York Times)≫ (2026. 09. 18). A Vision of Chekhov's 'Cherry Orchard' Rooted in Modern Korea,
https://www.nytimes.com/2026/09/18/theater/cherry-orchard-simon-stone-jeon-do-yeon.html
- ≪뉴욕타임스(The New York Times)≫ (2026. 09. 19). 'The Cherry Orchard', in Korean, Uses Chekhovs's Title but Not His Spirit,
https://www.nytimes.com/2026/09/19/theater/chekhov-cherry-orchard-simon-stone-korea.html
- ≪월스트리트저널(The Wall Street Journal)≫ (2026. 09. 18). ‘The Cherry Orchard’ Review: Chekhov Speaks Korean,
https://www.wsj.com/articles/the-cherry-orchard-review-chekhov-speaks-korean-5064641a
- ≪뉴욕 스테이지 리뷰(New York Stage Review)≫ (2026 .09. 18). The Cherry Orchard: Not Your Father’s Chekhov,
https://nystagereview.com/2026/09/18/cherry-orchard-not-your-fathers/?utm
- ≪보그(Vogue)≫ (2026. 09. 10). Simon Stone Brings a Radically New Cherry Orchard—in Korean!—to New York,
https://www.vogue.com/article/simon-stone-korean-cherry-orchard?u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