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계 이민자의 기억, 영화가 되다
- 세실리아 강 감독의 <이호 마요르(Hijo mayor)> 마드리드 극장 상영회 -

< 마드리드 극장에서 관객들과 만난 세실리아 강 감독 - 출처 : 통신원 촬영 >
스페인 마드리드(Madrid)에서 한국계 아르헨티나 감독 세실리아 강(Cecilia Kang)의 영화 <이호 마요르(Hijo mayor)> 상영과 관객과의 대화가 열렸다. 상영 현장에는 아르헨티나 출신 관객들이 다수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한국에서 출발한 한 가족의 이주 경험이 아르헨티나에서 영화로 재구성되고, 다시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관객과 만나는 자리였다. 이번 행사는 한국 문화가 국경을 넘어 전달되는 방식이 케이팝이나 드라마 같은 대중문화 콘텐츠에만 한정되지 않으며, 이민과 가족의 기억을 다루는 영화 역시 서로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을 연결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이호 마요르>는 스페인어로 ‘장남’을 뜻한다. 영화는 한국계 이민자 가족의 경험을 바탕으로 가족 안에서 부여되는 역할과 책임, 세대 간의 기억, 그리고 개인이 자신의 삶을 선택하는 문제를 다룬다. 강 감독은 상영 후 진행된 관객과의 대화에서 작품의 출발점이 자신의 가족사였다고 설명했다. 아버지의 과거를 돌아보고 오래된 사진과 기억을 모으는 과정은 가족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드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감독은 처음 영화 제작을 결심했을 때 아버지와 부엌에 마주 앉아 오래된 사진 앨범을 펼쳤던 일을 회상했다. 사진을 살펴보며 아버지에게 처음부터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부탁했고, 그 대화는 작품을 구상하는 데 영감을 줬다. 이후에는 아버지뿐 아니라 어머니와 여동생의 기억에도 같은 무게를 두고자 했다. 한 사람의 경험만으로 가족사를 설명하기보다, 각자의 기억을 모아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려 했다는 것이다.
가족의 역사를 영화로 재구성하는 일은 감독 자신에게도 새로운 이해의 과정이었다. 강 감독은 영화를 만들면서 자신의 가족을 이전과는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됐다고 말했다. 실제 인물을 그대로 재현하기보다는 허구의 인물로 거리를 두고 바라보면서, 그 인물이 어떤 상황에 놓였고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질문할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그는 인물의 행동을 비판하거나 이해하고, 때로는 용서하는 과정이 영화 제작을 통해 자신에게 일어났다고 이야기했다.
영화의 제목인 ‘장남’은 한국 사회에서 가족 구성원에게 부여되는 책임을 생각하게 한다. 강 감독은 한국 문화에서 장남이 형제자매를 돌보고 부모가 나이가 들면 부양해야 하는 등 가족과 사회의 기대를 짊어지는 경우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역할은 단순한 개인의 선택을 넘어 강한 사회적·가족적 의무로 작용할 수 있다. 영화는 이처럼 주어진 역할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대신, 그 틀에서 벗어나 자신의 길을 선택하려는 사람의 고민을 질문한다.
그러나 감독이 바라보는 가족과 정체성의 문제는 한국 사회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는 관객과의 대화에서 장남의 책임이라는 주제가 스페인에서도 공감을 얻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전했다. 가족을 돌봐야 한다는 의무와 개인의 삶 사이에서 갈등하는 경험은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도 발견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가족 문화라는 구체적인 배경에서 출발한 영화가 다른 사회의 관객에게도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이유다.
강 감독에게 한국계 아르헨티나인이라는 정체성은 두 문화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문제가 아니다. 그는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자랐고, 그곳에서 공부하고 일하며 살아온 자신 역시 아르헨티나인이라고 강조했다. 동시에 한국계라는 가족적 배경과 문화적 유산도 자신의 일부다. 서로 다른 문화가 한 사람의 삶 안에 공존하며 때로는 모순을 만들기도 하지만, 그 복합성이 새로운 관점과 경험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민자 가족의 언어 경험도 대화에서 중요한 주제로 등장했다. 감독은 부모 세대가 오랜 시간 아르헨티나에서 생활했음에도 스페인어를 충분히 익히지 못한 경험을 이야기했다. 그는 이주한 사람이 익숙한 땅과 전통을 떠나 낯선 환경에 놓이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언어와 문화에 더욱 의지하게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그는 아르헨티나의 한국계 공동체가 한국어와 전통을 꾸준히 유지하는 모습을 언급하며, 이주 이후의 문화적 정체성이 단순히 출신 국가와 거주 국가 사이에서 결정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 영화를 기다리는 관객들 및 영화 상영 후 감독에게 질문하는 관객들 – 출처: 통신원 촬영 >
이러한 경험은 이민 1세대와 그 자녀 세대가 같은 가족 안에서도 서로 다른 방식으로 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부모 세대에게 한국은 직접 경험한 고향이자 기억의 장소일 수 있지만,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자란 자녀 세대에게 한국은 가족을 통해 전달받은 이야기와 문화로 다가올 수 있다. 영화는 그 차이를 단순한 갈등으로만 그리지 않고, 자녀가 부모의 과거를 상상하고 질문하며 가족을 새롭게 이해하는 과정으로 확장한다.
감독은 한국계라는 외모 때문에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곳에서도 출신을 반복해서 질문받는 경험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Buenos Aires)에서 성장했지만, 일상에서 “어디 출신이냐”, “진짜 어디에서 왔느냐”는 질문을 받는다는 것이다. 때로는 상대에게 설명하고 대화할 수 있지만, 때로는 같은 설명을 반복해야 하는 상황에 지치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러한 경험이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라 여러 나라와 문화권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사람들에게 나타날 수 있는 현실이라고 강조했다. 이와 함께 이민자를 향한 차별과 적대적인 정치적 분위기에 경계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밝혔다.
여성의 시선 역시 영화가 던지는 중요한 질문이다. 강 감독은 작품이 장남과 아버지를 중심으로 한 남성의 이야기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여성의 관점에서 구성된 이야기라고 설명했다. 그는 한국과 라틴아메리카 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차별과 가부장적 구조가 서로 다른 형태로 나타나면서도 공통된 문제를 드러낸다고 봤다. 문화적 차이를 무시한 채 어느 한쪽을 단순히 평가하기보다는 각 사회의 역사적·문화적 배경을 이해하고, 그 구조를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영화 제작 과정 자체도 또 다른 도전이었다. 강 감독은 아르헨티나에서 영화를 만드는 일이 어려운 상황에서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제작진과 배우들의 협력이 결정적이었다고 밝혔다. 특히 한국계 공동체에서 살아온 사람들을 배우로 참여시킨 것은 이민자의 경험을 실제로 이해하는 인물들과 함께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전문 배우와 비전문 배우가 함께 작업하면서 서로 다른 경험과 에너지가 작품에 더해졌고, 일부 배우들은 영화 속 이야기가 자신의 아버지나 할아버지의 삶을 떠올리게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번 마드리드 상영에서 눈길을 끈 것은 아르헨티나 출신 관객들이 다수 참석했다는 점이다. 이들의 개인적인 이주 배경이나 영화에 대한 감정을 모두 알 수는 없지만, 아르헨티나의 한국계 가족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 스페인에서 아르헨티나 출신 관객들과 만났다는 사실은 의미 있는 장면이었다. 한 지역에서 만들어진 가족의 기억이 다른 나라에 거주하는 관객들에게도 새로운 질문을 던질 수 있기 때문이다. 상영 후 이어진 관객과의 대화는 관객들이 작품을 감상하는 데서 나아가 이민과 정체성, 가족의 역할, 언어와 차별 같은 주제를 함께 이야기하는 자리로 이어졌다.
<이호 마요르>가 보여주는 한국 문화의 의미는 한국의 전통이나 대중문화가 해외에서 소비되는 현상에만 머물지 않는다. 한국계 이민자의 삶과 그 후손의 복합적인 정체성 역시 한국 문화가 세계 각지에서 경험되고 재해석되는 중요한 일부다. 한국에서 출발한 가족의 기억이 아르헨티나의 사회와 만나 영화가 되고, 다시 마드리드의 관객과 대화를 이어 간다. 이 과정은 문화가 한 국가의 경계 안에 고정돼 있는 것이 아니라, 이주와 세대의 경험을 거치며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간다는 점을 보여준다.
사진출처 및 참고자료
- 통신원 촬영